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라서다. 그가 8년간 아버지를 돌본 이유다. 8년간의 돌봄 경험을 바탕으로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출판했다. 아빠가 쓰러지기 전까지 각자의 생계는 각자가 책임졌다. 1인분의 몫을 해내면 됐다. 아빠가 쓰러지고 감당해야 할 몫은 2인분으로 늘었다. 어려웠다. 버거운 날들이 계속됐다. 아빠는 증상이 심해졌다. 외출하면 길을 잃었다. 수도꼭지 트는 방향을 헷갈렸다. 양복 입은 남자가 자기를 감시한다며 집 밖을 뛰쳐나간 때도 있었다. 어떻게든 아빠의 일상을 보존하려 했다. 잘되지 않았다. 지급해야 할 간호비와 수술비의 규모도 늘어갔다. 제도의 도움을 받기위해 방법을 알아보지만 잘 안됐다. 제도는 조기현 씨의 근로능력을 2인분의 몫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른 부양의무자인 동생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신청이 거부되는 때도 있었다. 아빠를 돌보면서 자기 삶을 꾸리고 싶었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국가는 포기를 종용했다. 제도는 아빠를 돌보는 일이 가족인 당신의 최우선이라고 규정했다. 동시에 가난을 무능으로 치부했다. 도움이 필요한 당사자가 아니라 복지제도의 수혜자라는 취급이었다. 이런 환경이면 꿈을 꾸는 것조차 포기해야
“가족”이 대체 뭔데 인간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소중히 대해 주는 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내가 사회 안에 머물고 있으며 사회적 인정을 받는다는 감각(정체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테다)은 “나를 필요로 하고 소중히 대해 주는 이”에게서 얻는다. 일차적으로 개인은 가족에게서 그런 감각을 받는다. 가족이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원천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가족의 본질은 뽑기다. 어떤 가족에게서 자랄 건지 내가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날 때 배당되는 것이 가족인데 우리는 이를 천륜처럼 받아들인다. 가족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원천이어서지만, 그렇다고 필연으로 생각해 지나치게 의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거시적으로 바라보자. 가족이란 개념의 토대는 근대에서부터 출발했다. 미성년 자녀를 기르는 부부집단이 “가족”이라고 정의됐다.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일은 국가의 국민을 재생산하는 일과 같다. 자녀는 성인이 돼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주체로 성장하고 그래서 가족은 국가와 개인을 매개하는 셈이다. 개인은 가족을 통해 국가에 편입된다. 김민정 교수(강원대 문화인류학과)는 “애당초 국가는 근대 때부터 가족을…
고함이 나서 이어폰을 뺐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싸우는 소리였다. 문을 열었다. 내가 있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싸우는 게 아니었다. 아빠는 혼나고 있었다. 핸드폰 요금이 10만 원 넘게 나왔다는 이유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절박했는지 무릎을 꿇었다. 모멸의 언어가 아빠에게 달라붙었다. 고성과 모욕이 몇 번 더 오갔다. 마흔 넘은 아빠는 일흔 넘은 할아버지에게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라는 문장을 되뇌었다. 그걸 주문처럼 외웠다. 모멸이 격발되는 건 잠깐뿐이라고 스스로 되새기는 것처럼 보였다. 핸드폰 요금이 명시된 고지서를 봤다. 핸드폰 요금이 10만 원 넘게 지출된 건 교통비 때문이었다. 그때 아빠는 교통비를 낼 형편도 못돼서 핸드폰 요금으로 대중교통에 탑승했다. 고지서는 아빠가 끊임없이 이동했다는 증명이었다. 모욕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딘가 자기 가치를 알아줄 곳에서 노동하기 위해서였다. 몇 평의 방에서만 삶의 궤도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빠는 그걸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빠가 정말 무능한 인간인지, 뭘 했고, 뭘 하고 싶은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