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세상에 나쁜 취재원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 기자들을 얕잡아 보고 퉁명스럽게 대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배울 것은 분명히 있고, 오히려 까다롭게 구는 취재원들 덕분에 우리가 취재한 내용을 재차 꼼꼼히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사가 보도된 이후 편집국에 기사와 관련하여 항의가 들어오는 것 역시 어찌 보면 소중한 피드백이자, 향후 취재∙보도 방향을 정할 때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전 글<세상에 나쁜 취재원은 없다(1)>에서 나는 비협조적이고, 불친절한 취재원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들에게 겪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듯이 모든 취재원이 퉁명스럽고 우리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친절하고 협조적인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 모든 취재원은 불친절하고, 권위적? 우리 기자들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깍듯하게 인사하며 취재에 응해주시는 분들도 계시며, 인터뷰 내내 공손한 말투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학교 직원분들도 있었다. 기자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더라도 적극적으로 설명하며, 부족한 부분은 우리가 더 챙기겠다고 말씀하신 분도 있다. 취재가 끝난 이후에도 "기사 쓰실 때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다"며 추가 자료를 챙겨주기도 한다. 이러한 취재원들의 적극적인 설명은 질이 높고, 풍부한 내용을 담은 기사를 쓰는데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또 취재를 위해 학교 부서에 출입하여 자주 만나는 학교 관계자 같은 경우 밖에서 만날 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주시며 학내 취잿거리를 제안하거나, 관심 깊게 본 우리 학보사 기사에 관해 이야기 해주시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심층 취재를 위해 직접 현장에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경우에는 "우리를 찾아와 인터뷰해 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듣기도 했다. ■ 불친절한 학내 취재원들의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 처음 대학 언론인 생활을 시작할 땐 불친절하고 퉁명스러운 학교 관계자를 만나면 그들을 향해 속으로 '아니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저래'와 같은 생각을 되뇐 적이 많았다. 하지만 대학 언론인 4년 차에 접어든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구나' 한다. 우선 대다수의 학교 관계자, 학생들은 평범한 일반인들에 불과하다. 언론과 만나 인터뷰를 하거나, 언론인을 상대할 기회가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언론인을 만나고, 취재 과정을 접하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다 보니 불편하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학생 언론인을 만나는 것은 학내 논란의 당사자로서 만나는 경우가 보통이며, 논란을 짚기 위한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불쾌한 기색을 숨길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일례로 기자가 취재원에게 인터뷰 요청을 위해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가는 경우 많은 취재원이 "기자님. 저희가 정말 몰라서 그러는데요, 무슨 문제 때문에 찾아오셨나요?"와 같이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묻기도 한다. 자신들을 찾아온 학생 기자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 때문에 거부감이나, 견제 의식을 보내는 것이다. 수습기자 시절, 선배 편집국장도 나에게 "취재를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기자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게 흔한 일이 아니며, 논란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찾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분들 입장에선 충분히 당혹스러울 수 있으니 그들의 태도에 상처받지 말라"고 조언해주기도 했다. 우리 학생 기자들이 취재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좁은 취재 환경, '어른 대 학생' 구조로 힘들어하듯이 취재원들 역시 대학 언론인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학내 언론은 교내에서 논란거리가 생겼을 때 유일하게 대학 내에서 상황을 제대로 짚고, 신뢰성 있는 정보를 학내 구성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공식기구이다. 이 때문에 논란의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학생 언론은 유일무이한 해명 창구이자, 자신들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외부 창구이다. 특히, 이 같은 '취재원 대 학생 언론' 구조는 기성 언론의 관심도와 주목도가 떨어지는 일반적인 지방대의 경우 도드라진다. 따라서 취재원들 입장에선 학내 언론인들과 하는 인터뷰를 신중하게 하거나 그 과정에서 감정이 예민해진다. 그렇기에 기자 앞에서 민감한 내용을 과감히 말하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보통의 학교 관계자의 경우 기성 언론, 학생 언론 등 언론인들을 만나본 적이 많이 없다 보니, 그들을 상대하는 정무 능력이 떨어지기에 학생 기자와 취재원 사이의 낯뜨거운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 학생 기자, 취재원 모두 같은 학내 구성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 가져야 사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학생 기자들 역시 취재원들이 있어야 기사를 보도하고, 언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으며, 학내 취재원들 역시 학생 언론인들이 존재해야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학내 구성원들에게 알릴 수 있다. 즉, 서로 입장을 바꿔 살펴보면 학내 구성원들에게 기사를 보도하기 위하여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학생 언론인, 유일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학생 기자들에게 신중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는 학내 취재원들 모두 그들만의 상황이 이해될 것이다. 친절하든, 불친절하든 학생 기자들에게 취재원들은 모두 안고 가야 할 애증의 관계이다. 취재원이 취재에 불성실하게 대했다고 하여 악의적인 기사를 작성하거나, '기자' 신분을 이용하여 학내에서 대우 받으려 하고 인터뷰 과정서 갑질하려고 드는 태도를 가져선 당연히 안 될 것이다. 항상 겸손하게 취재원들을 대하고, 그들이 퉁명스럽더라도 왜 그들이 이런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는 기본적으로 배려하는 자세를 우리 기자들이 먼저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취재원들이 불성실하게 대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보도 거리를 포착하는 것 역시 기자의 능력일 것이고, 더욱이 취재원과 취재 과정에서 기자의 신중함과 공정한 시각을 잃지 않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올해 입학하는 새내기들을 위한 신문사를 소개하는 영상을 준비하며 받은 질문 중 '기자로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 언제였나'는 질문이 있었다. 처음에는 독자들의 응원을 받았을 때 가장 뿌듯했다고 말하려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에 취재를 나갔을 때 취재원분들이 되게 경계하고, 거부감을 드러내셨는데 인터뷰 과정에서 점점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주 만나면서 그분들이 기자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바뀌었고 덕분에 좋은 기사가 나간 경험이 있었다. 이후 취재원분들이 연락 와서 기사 잘 봤고, 우리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고맙다. 앞으로 열심히 활동해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뿌듯했다" 이처럼 취재원 역시 대학 언론인들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자, 이들이 있기에 우리가 언론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그들의 입장은 어떤지 배려하고, 존중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물론 사안을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할 대학 언론인의 기본적인 의무도 역시 놓쳐선 안 된다. 취재원들과 관계도 어찌 보면 또 다른 인간관계이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기에 함께 사는 세상 속 구성원으로서 존중한다면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도 우리가 학생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다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세상에 나쁜 취재원은 없다는 것이다. 김규민 (대구대신문사 편집국장)
애도할만한 존재, 친밀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미디어의 화법 일전에 친구와 한 종편 예능프로그램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예능 프로그램이 너무나도 재미있기 때문에 더 무섭다고 고백했다. 남성연대와 서열문화가 눈에 뻔히 보인다. 훼손과 무모함, 그 안에 숨겨진 폭력을 남성성으로 애써 감춰 포장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술자리 모습을 재밌게 풀어내고 동의에 근거하지 않은 일상의 폭력들을 평범하고 때로는 재밌기까지 한 상황으로 풀어내는 그 화법에 익숙해진다. 그들이 따르고 있는 질서에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소해 보이는 것은 사소하기에 더 위험하다. 비판과 경계가 아니라 습관과 익숙함의 옷을 입고 있기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런 영향이 있기는 했는지 따질 틈을 주지 않는다. 지난달 1일 한겨레 신문에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선생의 칼럼이 올라왔다. ‘내 슬픔은 누구에게 등을 보이고 누구의 얼굴을 바라보나’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이 밀려왔다. 모 기업가의 죽음은 온종일 포털과 지면을 달굴 정도로, 해석될만한 죽음으로 애도 되었다. 그의 서사는 많은 사람의 관심과 눈물 속에서 영광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마치 그의 공과 과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훌륭한 기업가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는 꼭지를 보도하는 기사도 쏟아졌다. 마치 그것이 세련되고 핵심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주장인 것처럼 말이다. 출처: 한겨레 신문, 2020년 11월 1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68019.html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다. 몇몇 언론사가 신문의 한 지면을 통째로 할애해야 할 정도로 집에 돌아가지 못했던 이들의 죽음은 많았다.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궤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할 공간은 없다. 칼럼의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영광된 기업가의 모습은 노동자들의 시체를 딛고 억울한 목소리를 차단하며 올라왔음에도 말이다. 이라영 선생의 칼럼을 읽고 다시 생각하고 싶어졌다. 무엇이 애도할만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무엇이 그 존재와 그렇게도 친밀한 관계를 맺게끔 해주고 있을까.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교집합조차 없을 거대한 권력에 선뜻 공감해줄 수 있게 만드는 일상의 사고패턴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당신이 보고 있는 친밀한 권력 최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서 기업의 이름이 자주 들린다. 정확하게는 뉴스에서나 오르내리는 기업 총수나 고위관리직들의 이름이다. 오락 프로그램에서 은유적으로 회자되기도 하며 때로는 하나의 웃음 요소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상표로서의 의미를 넘어 하나의 개그 코드가 되어 간다. 유튜브에서도 그들의 얼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능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마치 우리 곁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자 다국적 기업 급의 규모를 가진 기업의 총수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한다. 오히려 권위 없이 소탈해 보이게 한다. 출처: tvN 예능 프로그램 ‘신서유기’ 출처: tvN 예능 프로그램 ‘신서유기 4’ 예능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유튜브를 즐겨보는 입장에서 그런 미디어의 문법을 쭉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가까워진다. 친근해 보인다. 칭찬하고 싶지는 않더라도 이입된다. 우스꽝스러운 대화가 지인들의 모임처럼 느껴진다. 한 회사의 이사직에 놓인 사람이지만 원래 알았던 편한 사람처럼 괜스레 푸근한 인상을 준다. 모두가 아는 어떤 빵집의 상표명을 맞추는 퀴즈를 보고 있으면 어째 친숙하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기업의 이름을 알면서도 자막으로 애써 감추는 것도 요즘 예능의 한 트렌드로 자리 잡은 듯하다. 기업의 총수라는 사람이 나와 연예인의 농담과 애드리브에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인간미가 느껴진다. 징그러운 말이지만 때로는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인간들이 많았는지 모 대기업 총수의 소탈함을 다루는 유튜브 영상 조회 수가 100만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가 너무나 불쌍해 보였는지 회장의 죽음 이후 기업의 총수가 내야 할 상속세까지 걱정해주곤 한다. 예능을 보며 폭력적 문화에 무감각해졌던 나의 경험, 그리고 기업가를 향한 사람들의 공감은 위험하다. 단순히 ‘배부른 걱정을 하고 있네’라는 핀잔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우리가 언어로 꺼내기 이전부터 형성되었을 감정과 사고패턴이 기득권에 이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며 우리의 관점에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푸근한 존재로 그려지는 기업, 신비주의를 벗은 재계 총수들의 유튜버라는 최근의 동향은 ‘나’와 동일한 맥락을 가진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없애며 쌓아온 부와 다른 존재들을 죽이며 비정상적으로 견인되어 온 한국 사회에 대해 날카롭게 볼 겨를은 없다. 비판적 거리는 생기지 않는다. 출처: 정용진 신세계 회장이 이마트 유튜브에 출연한 이마트 라이브 영상 출처: MBC 콘텐츠 채널 엠빅뉴스 유튜브 영상 섬네일 출처: 네고왕 1화에 출연한 제네시스 BBQ 윤홍근 회장 우리가 그들을 친근해 하고 친구처럼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기업의 횡포는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는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형태로만 남겨둔다. 죽지 않게 해달라는 당연하고도 최소한의 요구마저 타협의 대상이 된다. 여성 인재 중용을 앞세우지만, 사실 지독한 착취의 정점에 서 있다. 기업의 이윤에 노동자의 건강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노조는 죄악이 된다. 우리가 예능에서 깔깔대며 본, “친근해 보이는” 바로 그 기업과 기업가들이 만든, 사회 구조 속에서 말이다. 누군가는 말 한 번 했다고, 세상 뭘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냐고 푸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당신 곁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듯해 보이는, 우스워 보이는, 혹은 어쩐지 귀여워 보이는 그들의 웃음을 웃음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찜찜하다. 이윤을 앞세워 밟고 외면해왔을 많은 사람이 얽혀있다. 그들은 불편한 권력이다. 방송에 나와 곤란해하고 당황해하고, 실실거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 따위로, 소위 귀엽게 의인화되어 재현된다고 한들 누군가의 생사를 쥐고 함부로 내던질 수 있으며 끝끝내 모른 체 할 수 있는 폭력이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위한 노조를 늘 불쾌해하며 조직적으로 부술 수도 있는 권력이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정규직으로 돌려 써가며 갈아 끼울 수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은 방송에 등장한 기업의 실제 잘못은 그게 아니네, 기업가가 실제로 잘못한 것은 아니네, 어쩔 수 없네 하는 허수아비 같은 논쟁이 아니다. 바로 미디어를 통해 하나의 상징으로 들어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순박하게 웃고 있는’, ‘권위적이지 않은’ 따위의 비판적 거리 없는 이미지를 선점했을 때 생길 사람들의 반응과 증상들에 대한 것이다. ‘친근한 권력’이라는 미디어의 문법은 당신 바로 옆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약자가 아닌, 접점조차 없을 권력에 아주 손쉽게 공감하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최근 대기업의 회장의 죽음을 마치 제 일처럼 아쉬워하고 슬퍼했던 자들이 눈에 선하다. 재계 총수들의 신비주의 탈피 전략, 예능 출연은 꽤 잘 먹힌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상속세 여론만 보더라도 그들의 선택과 어쭙잖은 변명에도 귀 기울여주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기억하자. 당신이 가까이 해야할 것은 그들의 “억울한” 상속세가 아니다. 규제로 대기업이 죽어난다는 헛소리도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아니다.
# 프롤로그 한국의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은 70%에 육박합니다. (e나라지표, “취학률 및 진학률(2015~2019)”) 이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치입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20대 초반의 나이면 ‘대학생’일 것이라는 인식이 당연하게 깔려있습니다. “어느 대학 다니니?”, “전공이 뭐니?”라는 질문은 실례이기보다 의례입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꾸준히 있었습니다. 몇 년 사이 페이스북에서는 ‘출신학교와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라는 문구의 자기소개가 유행과 의무처럼 번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문구 역시도 그들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만은 증명해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대학을 다니지 않는 청년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대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곤한 질문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왜 학교를 그만뒀어?” “무슨 일이야?”라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반면 대학생들은 “왜 대학을 다니니?”라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기 때문이죠. 대한민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삶을 ‘정상’이라는 틀 안에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사회에서 다름은 별남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르다’라는 표현엔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기운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별나다’라고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을 대표하는 단어가 ‘대학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흔히들 서로의 생활이 달라지면 할 말이 없어지고 어색한 사이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의 생활이 서로 달라서 즐거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로 즐거움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 E의 이야기 E가 대학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건 15살,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흔히들 대학을 가면 인생이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학 입학을 결정짓는 것 중 하나가 수능이다. 그 하루를 위해 매일 매일을 경쟁으로 채워야 하는 3년이 무서웠다. 그러던 중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꼭 대학을 거쳐야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E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과정이 쉬운 건 아니었다. 부모님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E에게 거는 부모의 기대가 유독 컸다. 그들의 기대는 E가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거였고, 중학교 때는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좋은' 동네로 이사하기도 했다. E가 결정한 선택을 부모는 포기로 받아들였다. E가 식음을 전폐해도 특성화고 진학을 반대했던 부모님이 결국 허락한 이유는 E의 다짐을 받아내서였다. 그들은 조건을 걸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가라고.” 그 이야기를 들은 E는 그 순간부터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짐에 가까운 억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확신은 아직까지 그에게 유효하다. 물론 당시 E가 특성화고 진학을 하게 된 건 선택보단 회피에 가까웠다. 하루 안에 결정 나는 인생이 싫었고, 경쟁이 두려워서 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E의 선택은 용감하고 다행스럽다. 특성화고에 진학한 그는 예전과 같이 시험에 얽매이지 않았다.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면 나란히 줄지어야 했던 책상 배열도 이젠 더이상 그를 압박하지 않았다. 대신 업무에 필요한 기술들을 익혔다. 각종 숫자와 프로그램, 프로세스에 익숙해지기 위해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19살 여름, E는 한 회사의 사무직으로 일하게 됐다. 2년여의 기간 동안 일하며 가장 크게 깨닫고 바뀌었던 건, ‘커리어우먼’, ‘멋진 여자’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 환상은 돈을 많이 벌고, 멋있는 연애를 하고, 주위에 아낌없이 물질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몇 년 간의 노동으로 그는 돈을 번다고, 직장을 다닌다고 해서 멋진 여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동시에 꼭 멋진 여자가 될 필요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완벽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경쟁의 공포에서 비롯된 E의 선택은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수반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을 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를 자유롭게 했다고 E는 말한다. 대학 대신 선택한 노동은 학교라는 공간 대신, 좀 더 자유롭고 과감한 선택의 세계를 열어줬다. ‘집-학교-학원’의 일정만 반복하던 그에게 사람을 만나고, 함께 하고, 어울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학생 땐 놀이공원을 가고 커피를 사 마시는 게 사치로 여겨졌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접하지 못했던 여유가 생긴 그는 점점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E가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되기까지는 여유가 필요했다. 경제적인 여유, 그리고 거기서 오는 심리적인 여유.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것. E는 ‘관계’를 다루는 법 역시 조금 일찍 알게 됐다. 종종 불편하고, 불안한 관계를 경험함으로써 얻게 된 소득이었다.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상대를 불쾌감 없이 마주하는지. 관계를 맺고 끊는 방법을 배웠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선 때론 들어야 할 것도, 듣지 않아야 할 것도 있다는 것 역시 알게 됐다. 역시 학교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세상을 먼저 경험해서 얻은 것들이었다. 물론 기분 좋은 경험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느새 ‘공부 못하는 학생, 안 하는 학생’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E의 ‘선택’이 E의 실력 없음으로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E가 (대학) 비진학을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이야기를 원했고, 그렇게 단정 짓길 좋아했다. E가 비진학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의무처럼 따라오는 질문도 있었다. “몇 살이니?”, “대학은 어디야?”, “왜 안 갔니?”, “고등학교 때 공부를 좀 못 했겠네.” 그 질문들 사이에는 대학을 가지 않는 것에 대한 편견이 서려 있다. 그리고 거기엔 대학 비진학 청년들의 서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저마다의 이유는 편견에 갇혀 발화되지 못한다. 회피로, 도망으로, 뒤처진 이들의 선택으로 여겨질 뿐이다. 특성화고 진학을 선택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다. E의 주변에도 다양한 선택의 연유들이 있었다. 가계를 걱정해야 했던 어떤 이들은 경제적 혜택을 이유로 특성화고를 택했다. 대학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걸 배우기 위해 온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을 다양함이라는 명제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그 선택의 뒷면에 ‘돈’이 있기 때문이다. “취직해서 돈 벌어야지”라는 생각이 누군가에겐 절대적이고 필수적이며, 또 일찍 찾아온다. 특성화고 진학을 선택하는 배경에는 생계를 책임지고 꾸려나가야 하는 절박함이 달려있다. 쉽게들 말하는 캠퍼스의 낭만은 누군가에겐 상상하는 것조차 버거운 것들이다. E의 선택은 일상의 차이로 이어졌다. 과제와 시험, 교수, 축제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E의 나이는 그런 이야기들을 소비해야 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만을 당연한 듯 생산했다. 미디어에서 20대를 상대로 소비되는 내용은 대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E는 그때 일상의 거리감과 괴리를 느꼈다. 구직할 때마다 당연한 듯이 적혀있는 “대졸”이라는 문구 역시 거리감을 제공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E는 대학 진학 대신 실무로 경력을 채웠다. 그의 경험이 학력과 동등하게 인정받길 바라는 마땅한 기대와 함께. 하지만 그가 대학을 가지 않는 대신 쌓았던 경험과 경력은 ‘대졸’이라는 두 글자 앞에선 효력을 상실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내 능력이 학력과 ‘무관’하지 ‘않은’ 사회다. 이력서에서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학력과 경력은 사실 같은 부피와 압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르게 존재하는 무게 사이에 능력과 노력과 성공에 대한 맹신이 있다. 운도 실력이 된다는 문법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여전히, “높은 취업률을 보장한다는” 특성화고 졸업생들의 일자리엔 어려움이 존재한다. 실무 경력이 있음에도 대학졸업자보다 적은 자리가 주어지고, 낮은 대우를 받는 건 일상이다. 그들의 일자리는 대학졸업자보다 안전하지 못하며, 안정감을 찾기도 어렵다. 학교에서는 회계와 포토샵, 무역 영어 등의 사무직 업무를 배우지만 이 배움이 반드시 사무직 취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그들의 자리는 자르기 쉬운, 가벼운, 그리고 쉽게 대체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E는 일했고, 일한다. 회사 사무직, 호텔 아르바이트, 키즈카페, 쇼핑몰. 많은 곳을 거쳤다. 이런 경험들로 자신의 호와 불호, 취미와 적성을 알아가고 있다.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 E는 즐겁다. 쇼핑몰 업무는 E가 여러 사무직과 아르바이트를 거쳐 찾게 된 그의 적성이었다. 다양한 직장을 거치며 그는 자신이 소규모 사업장에서 더 잘 적응한다는 걸 알게 됐다. 위계질서와 수직구조로 얽힌 딱딱함의 결정체는 그에게 회의감의 결정체가 됐고,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여러 쇼핑몰을 거치다 보니 다른 곳에도 시선이 갔다. 얼마 전까진 바텐더 일에 흥미를 느끼고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공부했다. E는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들을 한계짓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이다. 그는 여전히 일상을 어떤 노동으로 채워나갈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수정하고 있다. 그의 궤도는 그렇게 진행 중이다. 처음 대학을 가지 않기로 다짐했던 15살, E는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닐까, 이대로 무너져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다수가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 했고, 그래서 미지의 세계 같았다. 하지만 자신만의 궤도를 구축해나가는 생에서 그는 한 발 일찍 내디딘 것뿐이다. 두려움은 즐거움, 유연함, 여유로 변했고 그는 오히려 자신의 선택에 안도하고 만족한다. E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으므로, 세상이 틀렸다고 말해도 그에게는 정답이므로. 대학은 E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선택하지 않은 도구였을 뿐이다. # 에필로그 우리의 선택에 주어지는 무게들이 있습니다. 때론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을 통해 그 무게를 체감하곤 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들 속에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정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와 다른 선택은 선택이 아닌 포기가 되고, 그들의 질문은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로 끝납니다. 사실 그 질문이 원하는 건 이유가 아니라 변명입니다. 누군가의 선택과 이유를 핑계와 변명으로 받아들이는 권리가 타당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권리가 아니라 권력 아닐까요. 마침표로 끝나는 질문들에 때론 위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질문들은 내 선택과 세상이 말하는 ‘성공적인’ 삶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습니다. 그 거리감은 결국 난 아무것도 일궈놓지 않은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한 ‘정상’적인 궤도 밖의 삶도 가치가 있습니다. 이곳에도 만족과 안도, 기쁨과 성취가 존재합니다. 서로의 선택에 똑같은 짐이 주어지면 좋겠습니다. 똑같은 안전과 안정이 보장되면 좋겠습니다. 너와 나의 선택이 핑계나 변명, 포기와 회피로, 정상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주어진 삶과 숨을 감당하는 것, 그거면 됐다고 듣고 또 말하고 싶습니다. # 추신, 나의 길을 가는 우리들에게 저는 어릴 때부터 얼른 스무 살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스무 살은 '대학생'이었고,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스무 살이 되면, 아니 대학생이 되면 모두 부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멋지게 자신을 꾸미면서, 방학 땐 취미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 날 제 착각의 밑바탕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가야 한다’라는 인식이 깔려있습니다. 누구나 대학에 가는 줄 알았고,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와는 다른 길을 가는 친구들이 옆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많은 설명이 요구되는 순간들을 목격했습니다. 버거운 질문을 감당하는 친구들을 보며 속상하고, 분노했습니다. 자신의 선택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그들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너무 가까워서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이야기도, 애매한 거리에서 조심스러웠던 질문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S와 J, 그리고 E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들의 풍부한 삶에서 내가 아닌 ‘너’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의 무게를 배웠습니다. 이 기획이 누군가의 누락되고 흩어진 목소리를 발견하는 조그만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쌓여 결국엔 제가 좋아하는 소설의 제목처럼, 그 누구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편: https://www.univalli.com/news/article.html?no=23151 2편: https://www.univalli.com/news/article.html?no=23155
1. 나는 내 몸에 갇혀있다 2020년 10월 14일, 서울시NPO지원센터 비영리스타트업 5차 온택트 네트워킹 포럼 취재가 있었다. 당시 포럼의 주제는 페미니즘으로 대학, 연대, 교육, 기술, 미디어 등 여러 분야에서 여성주의 담론을 반영하고자 하는 단체의 발표가 있었다. 중요한 문제의식과 의제가 오갔다. 평소처럼 기사를 완성했는데 이상하게도 일을 떠나 계속해서 곱씹고 싶은 대목이 있었다. 취재 후 기사를 출판한 다음에도 유튜브 영상의 딱 한 구간만을 10번 넘게 반복해서 들을 만큼 생생했던 한 문장이 있었다. [말하는 몸_내가 쓰는 헝거]의 발표를 맡은 유지영 기자의 말이었다. “내 몸을 사랑하자(Body-positive)는 말이 아니라 일단 내 몸에 대해 말이라도 꺼내 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이 한마디의 말이 18살부터 지금까지의 내 샤워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대개 화장실 거울을 앞에 두고 정면을 바라보며 샤워를 한다. 하지만 나는 18살 때부터 측면으로 돌아 샤워를 해왔다. 화장실 거울은 상반신에서 하반신으로 조금 내려가는 부분까지 비춘다. 그래서 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급격하게 사이즈가 불어난 내 몸은 불편했다. 몸이 무겁다거나 관절이 아프다거나 튼 살이 생기는 건 익숙했다. 그보다도 더 힘들었던 건 피부질환이었다. 허벅지는 수시로 가려웠고 딱지가 생기면 뜯고 덧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사타구니에서 이어지는 허벅지가 검게 착색된 모습을 스쳐 가듯이 봤다. 끔찍했다. 약간의 실루엣과 색을 봤을 뿐인데 고개를 내려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 후로는 샴푸 통이나 바디워시 통으로 거울의 하단을 가리거나 아예 등을 돌려 샤워했다. 그리고 이 기사를 쓰는 지금도 측면 샤워를 고집하며 내 하반신을 내게 보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몸’이다. 많은 이들은 대개 비만인의 나태함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조언할 것이다. 두 가지의 시선과 조언을 시시때때로 받아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든 진짜 내 몸을 말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양쪽의 조언은 패배자 혹은 멋진 사람이라는, 결국에는 크게 다를 바 없는 허울이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지만 내 ‘몸’은 어쩐지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전히 치욕스러운 실패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몸, 착색된 내 피부를 사랑할 수 없다. 사이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혹여 내게 시선이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주제에 애써 관심 없는 척하며 화제를 돌린다. 비만인의 몸은 욕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양 굴어왔다. 내 사이즈를 보며 손가락질하거나 솔직하게 감상을 말하는 아이들을 무서워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 수많은 감정을 무의식 속에 가지고 가면서도 애써 내가 내 몸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확실하게 실패라고 믿으면서 실패가 아니라고 외쳤다. 2.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은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내 자신도 언어화해본 적 없는 이 감각이 유지영 기자의 한 문장을 계기로 튀어나왔다. “맞아, 나 내 몸이 싫어. 끔찍하게 미워. 사랑해주고 싶지만 정작 나부터가 내 몸을 쳐다보지 못할 만큼” 문득 [말하는 몸-내가 쓰는 헝거] 팟캐스트 방송의 시작이었다던 록산 게이의 『헝거』가 떠올랐다.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실 의심이 컸다. 또 비만인 자신을 어떻게든 사랑하라는 말이려나. 첫 부분을 읽자마자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나도 간절히 쓰고 싶다. 다이어트 성공 후기와 함께 내 안의 악마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물리쳤는지 마음껏 자랑하는 책을. 아니면 내 몸의 크기가 어떠하건 간에 내 몸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담담히 고백하는 책을. 하지만 나는 그런 책을 쓰지 못하고 대신 이런 책을 쓰게 되었다.“ 록산게이 『헝거』, pp. 2-3 “내 몸으로 산다는 것의 현실은 이렇다. 나는 감옥에 갇혀 있다. 이 감옥이 가장 좌절스러운 점은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인다는 점이다. 감옥 밖으로 손을 뻗을 수는 있지만 많이 뻗지는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괜찮게 여기고 잘 지내는 척하면 매우 쉬울 것이다. 내 몸을 내가 미안해하고 설명을 해야 하는 무언가로 보지 않는다면 좋을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고 여성을 비현실적인 이상에 구겨 넣으려 하는 천편일률적인 미의 기준이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다양한 체형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의 미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세세한 부분까지 바꾸려들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가치는 내 옷의 사이즈나 외모에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믿고 싶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악의적인 문화,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통제하려 하는 문화 안에서 여성으로 성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내 몸이나 내 몸이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비합리적인 기준에 저항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 이 두 가지는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 록산게이 『헝거』 pp.89-91 구체적인 존재를 제대로 본 적 없이 던지는 위로와는 달랐다. 앎과 감각의 괴리를 안다. 그 괴리 속에서 몸에 갇힌 채로 받는 상처가 무엇인지 안다. ‘몸’을 둘러싼 복합적인 감각을 안다. 『헝거』의 많은 대목과 유지영 기자의 언어는 그래서 강렬했다. 최근 여러 영역에서 ‘바디 파지티브’ 메시지가 자주 보인다. 비교적 나아진 방향이자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앞서 내가 나열해놓은 모순만 보더라도 정작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할 기회는 없다. 다양성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몸에 대한 말하기는 왜 시작되어야 하는지, 왜 ‘말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면 ‘바디 파지티브’는 공허할 뿐이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게 기능하기에. 비만인이 겪는 자기혐오, 사회적 기준에 포섭되고 싶다는 내밀한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 그저 그들이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냐는 삐딱한 생각도 들었다. 『헝거』의 서술을 빌리자면, “뚱뚱함 받아들이기 운동”은 사실 이미 누군가는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고 자신의 사이즈에 만족하는 척 살아가야만 하거나 무조건적인 자기 인정의 지점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뼈아픈 사실을 방증할 뿐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몸을 사랑하자’라는 명제 이전에 ‘몸을 말해보고 싶었다’는 말이 고마웠다. 섣부르게 긍정하기보다 몸을 스스로 말하고 구성하는 단계를 말했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내 몸 사랑하기’를 흔한 맥락에서 답습하기보다는 몸에 어떤 기억과 서사들이 새겨져 있는지 먼저 되돌아보는 구체적인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말하는 몸-내가 쓰는 헝거]의 기획자인 유지영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몸’을 말한다는 것에 관한 생각을 들어봤다. 3. 말하는 몸 :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아득한 경계 - [말하는 몸]은 어떤 방송인가? 자기 몸에 대해 말하기를 선택한 88명 이상의 여성과 함께 만든 오디오 다큐멘터리다. 평균 15분 정도 진행되고 오로지 출연자의 목소리로만 진행된다. 박선영 PD가 편집을 맡고 있고 나는 출연자와 1-2시간 인터뷰를 진행한다. 다만 예외적으로 출연자 혼자 녹음실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 말을 15분에서 20분 말하고 나온 출연자도 있다. 2018년 겨울, 인권운동가 이용수 선생님의 인터뷰를 첫 화로 시작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마지막으로 총 88회의 에피소드를 끝냈다. - [말하는 몸]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헝거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첫 장에 백세희 작가님 부분에서 나오는데, 나는 일을 시작한 지 1년 안 돼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에서 허우적거리다 인터뷰로 만난 분이 백세희 작가다. 백세희 작가의 저작인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읽고 너무 좋았다. 그 기회에 만났는데 그때 『헝거』를 선물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책이 정말 좋았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독립언론에서였다. 2015년에 내가 썼던 기사가 학과 내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알게 되었지만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이 내 몸이었다. 살이 찐 몸을 입 밖으로 말하기조차 두려운 상태로 페미니즘을 계속 공부하면서 내부 모순이 있었다. 록산게이의 『헝거』에 “내가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게 기능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록산 게이와 같은 유명한 작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신에 나와 다른 건 말했다는 거다. 그렇게 말함과 말하지 않은 아득한 경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헝거』를 읽고 좋은 책이라 처음으로 낭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렸고 박선영 PD가 연락을 줘서 오디오북 제작을 결정했다. - 몸에 대한 경험을 다룬 여러 책 중에서 왜 [헝거]였나? 너무 잘 써서 아닐까? (웃음) 어렵다. 헝거에서 제일 좋았던 챕터가, 벌목꾼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다. 굉장히 행복한 연애를 하다가 중간에 록산 게이가 먼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잘 안되고 그 남자가 자기를 따라와주길 원하지만 서로 그 얘기를 못하고 결국 헤어지는 장면이 있다. 헤어지는 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에게서 결국 웅장한 제스쳐는 나오지 않았다. 내 몸 때문일 거야”라고 말한다. 친구든 연인이든 관계를 맺을 때, 관계에서의 지속적인 관계 맺음이 성공 혹은 실패하는 경우가 몸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근데 관계에서의 성패조차 몸으로 해석한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몸에 사로잡혀있나를 보여준 것 같다. 록산은 자신의 몸을 “우리(CAGE)”라고 한다. 이 몸 안에 이 사람이 얼마나 갇혀있는지 보여준다. 내가 관계 맺음에 대해 관심이 많기도 하고 나도 이 몸 때문에 관계가 잘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경험이 있어서 더 그랬다. 옷가게에서 옷을 고르는 장면, 관계 맺음 속에서의 몸에 대해 결국 상처받는 모습에서 내 모습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에 『헝거』가 더 특별했다. - 『헝거』를 읽어 보니 낭독하고 싶고 오디오북을 만들고 싶었다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너무 강력한 책이다. [말하는 몸] 책 서문에도 썼듯이 정말 좋은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사소할지라도 결국에는 내 이야기와 연결된다. 말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나도 내 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말하는 몸]의 많은 에피소드가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도 인터뷰이의 복합적인 감정이 드러났던 편이 특히 인상적이다. 『헝거』의 핵심 중의 하나가 양가감정이다. 내가 내 몸에 대해서 어제는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가 이대로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감정을 잘 담고 싶었다. - 방송을 통해서 듣고 싶었던 바가 있었는가? 결국에 우리는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88명의 경험이 다르다. 너무 달라서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묶기조차 힘들고 페미니즘을 보는 시각도 아마 다를 거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성이라는 단어 아래 묶일 수 있고 내가 이들의 말을 존중하고 열심히 듣는다면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도 다다를 것 같다는 생각으로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팟캐스트를 듣는 사람들이 “나도 내 얘기를 해볼 수 있을까?”, “나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들과 다르지만 결국에는 같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4. 자기계발적 몸 담론이 아닌 ‘몸 말하기’로 - 최근 들어 ‘파지티브’가 자주 보인다. 그중에서도 바디 파지티브(Body-positive)가 페미니즘과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데, 페미니즘을 배우면서 느꼈던 내부 모순에 대해서 듣고 싶다. 몸에 대한 담론이 페미니즘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를 사랑하자,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해서 가혹한 사회에 대한 목소리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전히 말하기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자기계발 담론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몸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것이다. 몸은 내 책임이라는 신화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거다. 아픈 몸이랑도 연결된다. 아픈 몸은 내가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생겼다는 인식이 보통이다. 우울증이 대표적이다. 나가서 햇볕을 쐰다거나 운동을 하라든지 하는 자기계발 신화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자기계발 담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뚱뚱한 몸을 말한다는 것은 실패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실패한 사람이 되기 싫고 나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을 거다. 그리고 실제로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말을 꺼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고 봤다. 아직도 네이버 댓글이나 SNS를 보면 몸의 정상성에 대해서 여전히 갈망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몸의 정상성이라는 게 조금씩 넓어지고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협소한 게 현실인 것 같다. 여성으로서 마른 몸을 선망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근육을 길러서 단단한 근육이 있는 몸을 선망하기도 한다. 근데 그 선망하는 범위가 조금 넓어진 것일 뿐이지 여전히 다양성에 대한 수용성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내가 열심히 운동해서 근육을 만든다, 누군가는 그게 마른 몸을 선망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하겠지만 여전히 몸의 정상성이라는 기준을 세워놓고 그걸 향해 간다는 점에서 아쉽게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확하게 이 몸이 정답이다’ 혹은 ‘마른 몸을 벗어나서 단단한 몸으로 가야한다’고 하지만 또 하나의 정상성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경우에는, 우울증이 조금씩 낫기 시작하면서 살이 급격하게 찌기 시작했다. 3년 전, 20킬로가 쪘다. 찔 때는 잘 모르고 있다가 찌고 나서야 실감했다. 우울증이 낫기 시작할 때는 마음이 좀 안정된 상태, 몸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상태였다. 몸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뭔가를 먹었고 20킬로가 찌고 나서 이 몸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다. 『헝거』를 읽고 나서도 내가 내 몸을 인정해야지 이런 순간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 몸이 아니라 ‘이거’를 어떻게 해야 하지? 뭔가를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서 지금도 100% 자유롭냐고 하면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신나리 출연자의 에피소드가 기억이 난다. 몸에 대한 인식은 직선이 아니다. 끊임없이 너울을 만들면서 몸에 대한 강박을 조금 덜고 내일은 좀 더하더라도 그래도 괜찮고 이런 너울을 견디는 거다. 말하는 몸을 하고 나서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냐고 하면 정말 자유로워졌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조금 나아졌을 뿐이지 절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조금 나아졌다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은 희망을 품고 싶은 마음이 있다. ‘문학 3’이라는 웹 매거진에 ‘그래서 달라졌습니까’라는 기고문을 연재한 적이 있다. 말하는 몸 진행 중에 있었던 일이다. 회사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왔는데 유리문에 비친 내 실루엣을 보고 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내가 방송을 만든 지가 꽤 되었는데 아직도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바디 파지티브(Body-positive)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한계를 느꼈는가?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도 있을 수 있지만, 어느 정도는 쌍방향 소통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바디 파지티브(Body-positive)’는 공허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 내 몸을 사랑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불순한 의도도 섞여 있다고 본다. 결국에는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해야지’, ‘네가 노력해야지’라는 말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개인화하는 거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 몸의 정상성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편협한 기준을 갖고 있다. 가슴이 크고 허리가 잘록하며 골반이 나와 있고 엉덩이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하고 가는 팔다리. 심지어는 소음순 수술도 권하는 사회다. 그 사회에서 내가 내 몸을 사랑하면 된다는 말이 내가 노력해서 일구면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노력을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일까?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될 일인지 싶다. -서울시NPO지원센터 발표에서 “‘바디 파지티브’ 이전에 ‘내 몸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기획하게 되었다. 이 부분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한다. 말하지조차 못하는 것, 극심한 고통이나 너무 심한 콤플렉스를 사람들은 대체로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말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치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나한테는 여러 가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몸이 바로 그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말하는 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일단 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어떤 형태의 몸이든, 이 사회가 말하는 정상성의 몸 말고 다른 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선 답변에서 바디 파지티브가 개인화되어 있다고 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몸에 대해서 각자의 다른 몸을 말한다면 사회적인 발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가 있는 거다. 개인적으로는 내 몸에 대해 감정적 골이 깊어서 꺼내지 못했던 걸 꺼내 보는 거, 정말 창피하지만 말해보고 견뎌보는 거다. 근데 그게 여러 명이 되면 그 자체로 사회적인 의미가 형성된다. 그리고 말하는 몸의 출연자 중에 나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 확신한다. 분명히 처음 몸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내가 록산 게이의 책을 읽었을 때 “이건 분명히 나의 이야기이기도 해” 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 더 많은 ‘몸 말하기’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공동의 증언이 갖는 효과를 말하고 싶었다. 가령 위안부 당사자의 공통된 증언, 혹은 조금씩 다른 증언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위안부 운동의 맥락에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말하는 몸을 보면 가볍게 말한 분들도 있고 무겁게 말한 분들도 있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는 증언이다. 증언이 같고도 다를 때 사회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결국에는 몸의 개인화를 막아준다. 내가 노력해서 만드는 몸이라는 신화에 맞서게 해준다. 몸 이야기를 할 때 고립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말하는 몸]이 없었으면 나도 내 몸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을 거다. 그래서 책에 "출연자들의 용기에 경유해서 나도 내 몸을 말해보려 한다"고 썼다.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독자들이 읽고 자기 몸에 대해 ‘나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사랑하든 아니든 일단 말해보는 거다. 말하는 것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5. 몸을 말하고 몸에 대해 쓰다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이 글의 서두에 담긴 치욕적 실패의 이야기를 수십 번 다시 읽지만 여전히 다 드러내도 될까 두렵다. 극적인 변화는 생기지 않는다. 사회적 기준에 포섭되고자 하는 욕망을 모른 척하지 못한다. 그러나 ‘몸 말하기’의 결론이 끝없는 비관과 내 몸을 향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증오는 아니다. 다만, 한 출연자의 말처럼 ‘내 몸을 받아들이자’가 아니라 매일 지는 싸움이 되더라도 ‘어제보다 조금 덜 미워하자’로 나아가려 한다. 그렇기에 말한다. 내 몸에는 많은 감각과 경험들이 존재하고 엉켜있다고. 그리고 또 하나의 목표가 있다. 이 글이 “ 나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의 용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쓴다. 『헝거』에는 록산 게이가 옷가게에서 만난 소녀가 등장한다. “들어간 매장에 있는 어떤 옷도 입지 못할 정도로 너무 큰 몸을 하고, 그저 어떻게든, 아무거나 나에게 맞기만 하는 옷을 찾아 헤매면서 그 와중에 생각해주는 척하는 사람들의 뾰족하고 무신경한 평가와 잔소리까지 꾹 참고 들어야 하는 그런 소녀. 옷 가게에서 그런 소녀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소녀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잘 안아주는 사람이 아니지만 당장이라도 그 소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소녀를 이 나쁜 세상으로부터, 뚱뚱한 사람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이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싶었다. 사실 나도 이 세상이 어떤지 알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내가 그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건 없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타인의 잔인한 눈초리와 지적질에서, 너무나 좁은 의자에서, 아니 이 너무나 큰 몸에는 너무나 작은 모든 것에서 도망쳐버릴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나 안전지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탈의실까지 따라 들어가서 그 소녀에게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실제로 정말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얼굴 위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록산게이 『헝거』 p.52 록산 게이가 그러했듯이 여성의 몸에 지독하게 잔인한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말하는 것조차 두렵게 만든 이 세상에서, 몸을 둘러싼 앎과 감각의 충돌에 무관심했던 이 세상에서, “몸 말하기”를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하나의 용기가 되길 바란다.
2020년 전례 없던 코로나19 사태로 전국 대다수의 대학에서 1학기 내내 전면 비대면 수업이 시행됐다. 원격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수업에 따라 강의 질은 제각기 달라졌다. 한 대학 커뮤니티에서는 십여 년 전에 녹화한 강의 영상을 재방송하는 교수를 지적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외대를 포함한 많은 대학에서 학생들이 낮은 강의 질에 불만을 표했고, 이에 따라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상반기 등록금을 반환하라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등록금 반환 문제가 소송으로 이어지는 등 논란이 계속되자 각 대학은 등록금 부분 환불 혹은 장학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등록금을 일부 반환하는 결정을 내렸다. 외대 역시 지난 8월 코로나 19 특별장학금(HUFS Dream 장학금)을 지급했다.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1학기 전면 비대면 강의를 실시한 점과 그로 인해 대학 내 시설 이용이 불가능했던 점을 감안해 이와 같은 장학금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19 특별장학금(HUFS Dream)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20학년도 1학기 학부 재학생을 대상으로 입학금을 제외한 2020-1학기 등록금 책정액의 3%를 지급한다. 단, HUFS Dream 장학금은 1학기에 수령한 장학금을 합하여 등록금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급한다고 밝혔다. 2학기 HUFS Dream 장학금은 등록금 반환 목적이 아닌 가계 곤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생활비 목적성 장학금이라는 데에 차이가 있다. 서울 캠퍼스와 글로벌 캠퍼스 간 지급 내용 및 방식에도 다소 차이가 있었다. 다음은 학교에서 제시한 2020년 1학기와 2학기 HUFS Dream 장학금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외대의 코로나 19 특별장학금은 전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급한다는 점에서 비대면 수업에 따른 등록금 반환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과연 HUFS Dream은 학생들이 요구하는 등록금 반환의 본질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아니면 학생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외대만의 꿈’으로 남아 있을까. 코로나 19 특별장학금, HUFS Dream에는 여전히 등록금 반환을 둘러싼 여러 논란과 문제점이 존재한다. 본 기사에서는 외대가 마련한 HUFS Dream 장학금 중 2020-1학기 코로나 19 특별장학금(HUFS Dream)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공지사항은 학교 홈페이지 아닌 에브리타임에서 먼저, 가장 기본적인 장학금 지급 일시에 관한 공지가 부족했다. 학교 홈페이지에는 코로나 특별장학금에 대한 구체적인 지급 일자가 나와 있지 않을뿐더러 지급 후의 공지 역시 없었다. 일례로 에브리타임에서 “코로나 장학금 언제 주는 거지”, “아직 못 받은 사람 있나요” 등의 장학금 지급 시기에 관한 질문이 수차례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급 지연 공지 역시 부족했다. 학교는 지난 10월 중으로 기준을 충족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을 완료했지만, 지급 지연 등 관련 공지사항이 없어 학생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기도 했다. 또 다른 사례로 한 학생이 코로나 장학금을 받지 못해 학교에 직접 문의한 결과, 9월 중으로 장학금을 받지 못한 학생들에겐 10월 안으로 지급하겠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는 글이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다. 장학금 관련 공지가 부족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장학생 학습권 침해 보상=0원? 코로나 19 특별장학금(HUFS Dream)의 장학 내용을 살펴보면 등록금성 장학금이라 명시되어 있다. 이는 비대면 수업으로 인한 등록금 반환을 의미한다. 그러나 외대 특별장학금에는 장학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먼저 전액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실질적으로 코로나 19 특별장학금(HUFS Dream)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학교 측에서 제시한 장학금 지급 기준 중에는 “1학기에 수령한 장학금을 합하여 등록금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지급한다” 라는 세부 사항을 두고 있다. 따라서 직전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등록금을 초과하는’ 특별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부분 성적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성적 장학금을 받지 않은 학생들보다 특별장학금을 덜 받게 된다. 이 역시 학교에서 제시한 장학 금액인 ‘2020-1학기 등록금 책정액의 3%’라는 기준 때문이다. 직전 학기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그 비율만큼 코로나 장학금을 덜 받게 되는 것이다. ‘등록금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실제 납입금액의 3%’라는 기준은 언뜻 보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학생들이 등록금 반환을 요청한 이유는 비대면 수업으로 인한 학습권 침해 및 학교 시설 이용 제한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부분 혹은 전액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비대면 수업으로 인한 학습권 침해를 겪지 않았을까? 이 점을 고려한다면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코로나 19 특별장학금을 받지 못할 분명한 이유는 부족해 보인다. 소통하지 않는 학교, 진심 없는 등록금 반환 지난 9월 코로나 19 등 재난 상황에서 대학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등록금을 감면할 수 있도록 하는 ‘고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됐다. 등록금 면제 여부나 감면 액수는 등록금심의위원회(등심위)를 통해 결정하도록 했다. 강제적으로 등록금을 면제/감액할 수 없는 ‘임의규정’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등록금 반환을 대학에 공식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여러 대학에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학생들과의 협의를 개시했다. 연세대학교의 경우, 코로나 19 관련 등록금 반환 의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기존의 등심위 외에도 학교와 학생 간에 논의를 진전할 수 있는 ‘소위원회’를 별도로 설치했다. 이와 같은 조치가 즉각 등록금 반환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측에서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실제 해당 기구에는 교직원 외에도 총학생회장, 단과대학 학생회장 등이 참여하여 학교 측과 학생 측의 입장을 교환한 끝에 특별지원금의 종류와 액수를 결정했다. 해당 사례는 이번 개정안이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학생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학교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서는 ‘등록금심의위원회’의 내실 있는 운영이 필요하다. 등록금심의위원회(등심위)란, 등록금 및 학생 1인당 교육비 산정근거, 도시근로자 평균 가계소득, 등록금 의존율 등을 고려해 해당 연도의 등록금을 적정하게 산정하기 위해 고등교육법에 따라 설치 및 운영하는 법정기구다. 등심위는 대학 교직원, 학생,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다. 고등교육법 제11조 4항에 “학교의 설립자·경영자는 등록금심의위원회의 심의 결과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고 적혀 있지만, 심의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피력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다. 2020년 1학기 등록금 반환이 성적장학금을 반액으로 감액하면서 집행됐던 것이 바로 그 예다. 서울캠퍼스 총학생회 ‘새벽으로부터’ 총학생회장 김나현 씨는 학교의 등록금 반환 움직임은 학생들의 요구보다는 교육부의 등록금 반환에 대한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교육부는 지난 10월 ‘대학 비대면 교육 긴급 지원 사업’ 하에 실질적 자구노력을 통해 특별장학금 등을 지급한 대학 중 누적적립금이 1000억 원 미만인 대학에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외대 본부 역시 해당 지원금을 받기 위해 갑작스럽게 특별장학금을 편성했다는 것이 김나현 회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특별장학금은 기존에 사용되지 않은 예산 등에서 따로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학생회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성적장학금 일부를 떼어내는 방식으로 강행됐다. 이와 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외대가 겪고 있는 ‘재정난’이 있다. 김나현 회장에 따르면 학교에는 작년 한 해 50~60억가량의 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학교 측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코로나19 방역물품 구매, 혹은 온라인 강의를 위한 시설 정비 때문에 적자가 난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확산세로 인해 한국어문화교육원, FLEX, 외국어연수평가원 등의 사업이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한 것이 오히려 그 원인이다. 위 사업을 총괄하는 외대 부서인 사업지원처에서 매해 약 30억 원을 학교 예산으로 지원했었으나, 올해는 도리어 학교 본예산에서 사업지원처 운영에 들어가는 고정비용 지원을 위해 약 15억 원을 지급하게 됐다. 이와 더불어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대학혁신지원사업’ 평가에서 최하위 등급을 받고, 감사 과정에서 회계 부정·비리 등이 적발이 돼서 결과적으로는 기존에 받는 금액 중 12억 원가량이 삭감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대학과 비교했을 때 적립금마저도 충분치 않아, 실질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없어 사학진흥재단에 손을 벌리고 있다. 이처럼 적자에 허덕이는 학교에게 교육부의 ‘대학 비대면 교육 긴급 지원 사업’ 제안은 솔깃했을 것이다. 김나현 회장은 학생들의 등록금 반환 요구에 대한 학교 측의 몰이해를 지적했다. 총학생회가 학교 측의 재정난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등록금 반환 의제를 밀어붙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학교는 이번 특별장학금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성적장학금을 절반으로 감축한 것 외에도 해외 교류 프로그램이 취소되면서 발생한 미사용 장학금 등 각종 장학금의 잔여액을 사용했다. 김 회장이 ‘HUFS Dream 장학금’을 ‘진심이 없는 등록금 반환’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각종 프로그램이 취소되며 자연감소분이 발생했다면, 학교 행정이 아닌 다른 장학금의 형태로 학생들에게 지원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존에 학생을 위해 마련했던 재원마저 ‘재정난’을 이유로 학교 운영에 사용되는 상황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특별장학금 지급 문제의 본질에는 ‘등록금 반환’과 ‘학습권 침해’가 있다. 외대알리는 같은 맥락에서 이공계 학과 실험실습비 반환 문제와 대학원생 등록금 반환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한다. 실험·실습 강의는 구경도 못 했는데 등록금은 온데간데없고 공과대학 및 자연과학대학 등 이공계 학과에서는 실험·실습이 주가 되는 전공 수업이 다수를 차지하기에, 등록금에 ‘실험실습비’가 포함된다. 하지만 코로나 19 감염확산에 따라 대학 수업이 거의 비대면으로 전환되며, 실험·실습 강의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에 학교는 2020년 2학기부터는 실험·실습 강의가 감염상황에 관계없이 실시될 수 있도록 수업 시행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1학기에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 실험실습비에 대한 논의는 진전이 없는 상태다. 실험실습비 반환 논의가 지지부진한 원인 중 하나는, 이공계 학과의 등록금 고지서에 실험실습비가 얼마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캠퍼스 총학생회 ‘ON’에 의하면, 학교 측은 실습비의 정확한 금액을 측정하기 어려울뿐더러, 이를 책정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액수를 기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실습비 반환 액수 역시 정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2020년 5월 12일에 개최된 제2차 대학평의원회 회의록을 보면, 2019년 기준 “이공계의 높은 등록금 수준에도 불구하고 이공계 실험실습비 지출에 오히려 잔액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습비에 할당되는 예산이 얼마인지 파악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학교 측의 설명에 따르면 실험실습비는 “실험·실습 기자재 관리운영위원회에서 학과별로 배정한 예산을 학과의 신청에 따라 집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과별로 할당된 예산과 실제 수업일수, 학생 수를 고려해 계산한다면 실험실습비 반환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소리다. 학교 본부가 ‘재정난’을 호소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실험실습비 반환 논란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공과대학 학생회에 따르면, 작년 글로벌캠퍼스 총학생회 ‘더본’은 2020년 4월 3일 총장과의 면담, 7월 16일 부총장과의 면담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실험실습비 반환을 요구했다. 이때마다 학교 측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산 지출이 증가했고, 이로 인해 재정적으로 곤란하다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총학은 학교 측에 반론하며 코로나19로 인해 추가로 사용된 예산안을 공개하라 요구했지만, 학교는 ‘경영상의 기밀 유지’를 이유로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이는 사용되지 않은 학생들의 실험실습비가 학교의 재정난을 메꾸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총학생회 ‘ON’은 “하지도 않은 실험·실습에 돈을 내는 경우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향후 올해 1학기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경우 대면 강의 진행 여부에 따라 기간에 비례한 환불조치를 요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리도 학생이다: 언급조차 되지 않은 대학원생들 대학원생이 코로나 장학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 것 또한 하나의 모순이다. 교육부는 지난 7월 ‘대학 비대면 교육 긴급지원 사업’을 통해 학부생에게 특별장학금을 지급한 237개교에 총 1000억 원가량을 투자하여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학생들을 지원하도록 장려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지원 사업에서 “대학원생 지원 금액은 제외”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더 많은 대학을 수혜대상에 포함하기 위해 대학원생들을 부득이하게 제외했다는 것이다. 이에 서울대, 이대 등의 대학원 총학생회는 전국 대학원 총학생회 네트워크를 구성하며 교육부의 결정에 항의했다. 긴급지원 사업의 목적이 대학의 교육, 연구 역량 저하의 방지인데 학업에 열중하는 대학원생들을 제외한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생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한국외대를 포함한 대학 대부분은 사업계획안을 핑계로 대학원생들의 피해 보상에 대해서 방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대학원생을 학부생과 완전히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대학원은 대학보다 더 선택적인 교육 기관이고,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경우도 많아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학부보다 비싼 등록금과 적은 장학혜택을 제공하는 대학원에서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 청년들은 대학생들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할 수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학원생이 받은 학습권 침해는 학부생과 같다는 점에서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 대학원생은 코로나 사태로 학내 시설을 이용하지 못한 데다, 학습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실습실이나 연구실 등을 쓸 수 없어 학업 환경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현재 한국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A 씨는 학내 세미나가 수업만큼이나 배움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코로나로 열리는 세미나가 없어 학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학업적인 문제와 더불어 청년 대학원생들은 조교 업무가 가중되는 부담도 겪고 있다.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는 청년 대학원생들은 보통 조교 업무를 통해 장학혜택을 받는다. 비대면 수업 개시 이후 업무 시간이 아님에도 부가적인 수업 자료를 제작하거나, 기숙사 이용이 제한되어 먼 거리를 통학해야 하는 고충을 겪는 조교들에게는 어떠한 추가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20-2학기 한국외대 대학원에서는 대학과 마찬가지로 10월 20일부터 대면 수업을 진행했지만 한 달도 넘기지 못하고 비대면 수업으로 재전환됐다. 그동안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한 보상 논의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대학원생들에게도 학부생과 마찬가지로 장학금을 지원한 대학도 존재하지만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대학이 장학금이나 등록금 환급에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A 씨는 학생 개개인의 상황이 다른 대학원의 특성상 대학 총학생회만큼의 화력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청년이 경제적인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 충분한 학업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대학원생들을 단지 교육부의 정책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대학의 행태는 실망스럽다. 등록금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학교에게 한국외대는 원격 수업을 코로나 상황 안정 시까지 무기한 연장하며 사실상 여름 계절학기를 포함한 작년 상반기 내내 전면 비대면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하반기에는 ‘Switch ON’ 제도 시행을 통해 잠시 대면 수업을 재개했으나, 코로나 확산세에 따라 다시 비대면으로 전환하기를 반복했다. 준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진행되었던 비대면 수업은 이클래스(e-class) 서버 다운, 강의 음질 문제 등 여러 피해를 낳았고, 대면과 비대면이 섞여 있는 시험 기간은 학생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했다. 이는 한학기 시행착오를 거친 2학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본부가 2020년 2학기에 ‘스위치 온 1’, ‘스위치 온 2’와 같은 수업 시행계획을 세워 대면 수업을 강행한 데에서는, 2학기 등록금 반환 논의를 피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려는 속내가 읽힌다. ‘학생들의 수업권을 보장하기 위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라고 주장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한편 재난 상황 시 등록금을 감액할 수 있도록 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올해 1월 21일부터 효력을 발휘한다. 등록금 반환 의제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심도 있고 치밀한 전략 마련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총학생회의 향후 계획은 어떨까. 김나현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장은 “(스위치1이) 학생들의 큰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행됐고, 제대로 된 장비조차 마련되지 못한 채 진행됐다. 마이크나 웹캠 같은 경우에도 학생들이 추가로 요구를 해서 그나마 개선된 거다. 그런데도 (미흡한 점이 많아) 학생분들이 총학생회에 보내준 증거 자료가 정말 많다. 심지어 김인철 총장은 스위치1 시행 주를 ‘시범 운영 주간’이라고 칭했다. 학생들에게는 수업 한번 한번이 등록금과 직결된 문제다. 그렇기에 총장을 필두로 한 학교 측의 태도에 굉장히 실망했다. 학생분들이 보내준 증거 자료를 취합해, 실질적으로 학교가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문제가 많은 정책을 강행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피해가 발생했다는 걸 증거자료로 확보하고 등록금 반환 요구를 진행하려고 한다”라고 밝혔다. 그와 더불어 김나현 회장은 등록금 반환 논의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교육부의 학교에 대한 압박이 수반돼야 한다는 점을 짚었다. HUFS Dream이 '외대만의 꿈'으로 남지 않기 위해 —특별장학금·등록금 반환 문제의 본질 사립대학들은 여태까지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우며 높은 등록금을 합리화해왔다. 학교로부터 직접적인 편익을 받는 자들이 비용을 부담하되, 그 부담의 정도는 편익을 받는 정도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난 상황으로 인해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의 질이 강의 별로 천차만별인 지금, 수업 손실을 본 학생들이 등록금을 환급해 달라는 주장은 다분히 합리적이다. 대학의 본질은 교육기관이다. 학습권 침해 외에도 주거 문제, 생활고 등 학생들이 원활하게 교육을 받기 어려운 상황을 초래하는 여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학교는 70%가 넘는 강의를 대면 수업으로 전환하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들을 방기했다. 개강 2주 이후 수업방식을 정하지 않아 학생들이 주거 문제로 우왕좌왕하게 했다. 대면 수업 재개 이후 교내 확진자가 발생했을 시의 대처 매뉴얼 역시 미비했다. 만일 대학이 스스로 정체성을 ‘교육기관’이 아닌 ‘사업자’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등록금 반환 문제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수요자인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이를 교육 서비스 운영에 반영하면 된다. 수요자인 학생들의 요구를 외면한 채 학교의 편의에 따라 대면 수업과 비대면 수업을 오가는 ‘Switch ON’ 제도 등은 일관적인 강의의 질을 담보하지 못하고, 학생들이 매주 안정된 환경에서 강의를 수강할 수 없게 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이미 외대는 1학기 때 코로나 19 확산세에 따른 정부 지침으로 인해 대면 강의 전환을 포기했던 전례가 있었고, 2학기 시작 직전 ‘Switch ON’ 계획을 발표하자마자 폭발적인 확산세로 결국 개강 직전에 비대면 수업 전면 전환을 발표한 바 있다. 2020년 말까지 확산세 진정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제 대응을 통해 안정적인 학습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학교의 책무임에도 불구하고, 외대 본부는 이를 내버렸다.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학생들이 주장하는 ‘학습권 침해’와 ‘등록금 반환 요구’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단하고 소통하려는 학교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는 올해 5월 학교 측에 코로나 사태와 관련하여 예산 변경 내용, 예산 대비 실제 지출 내역 등을 학생들에게 확실히 공개하기 위해 등심위와는 별도의 협의체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안건 상정 당시에는 학교 측의 반대로 논의가 진전되지는 않았으나, 고등교육법 개정안 도입에 따라 등록금 반환 논의도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 1월 말에는 2020년도 결산과 2021년도 본예산을 심의하는 등심위 본회의가 예정돼 있다. 학생과의 소통을 회피해 왔던 학교 본부가 당면한 의제 앞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주목할 때다. ‘HUFS Dream’이 ‘외대만의 꿈’이 아닌 ‘외대 구성원 모두의 꿈’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 글, 취재 박혜민 기자 (floshmlu@naver.com) 이재현 기자 (jaedi9@naver.com) 조시은 기자 (ohno2828@gmail.com) *기사 내용 중 '실험실습비 반환' 문제는 외대알리에서 진행한 독자 이벤트 '알리야, 이 기사 써줘!'에 응모해주신 이호준 독자님의 제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취재를 진행했음을 밝힙니다.
“작년 초, 코로나19로 새내기 배움터가 취소될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오고 그날 취소되었다. 새내기 배움터 기획단 모두 열심히 참여했고, 프로그램이나 진행 순서도 짜놓은 상태에서 취소가 되다 보니 ‘어떡하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20학번 분들이 안타까웠다. 코로나19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차일피일 미루다 엎어진 사업들도 많았다.” IT학부 학생회 윤다혜 학생회장은 회대알리와의 인터뷰에서 작년 이맘때쯤을 회상했다. 코로나19로 OT와 새내기 배움터(새터)가 무산되었던 20학번을 안타까워하며, 올해 OT와 새터는 대상자 폭을 넓혀 신입생 외에도 20학번이나 군 휴학으로 인해 온라인 수업을 겪지 않고 복학한 학생들까지 대상으로 한다고 밝혔다. 2020, 코로나19로 비대면으로 진행된 학생회 사업 작년 한 해는 모두가 코로나19와 초면인 해였다. 올해는 줄곧 대비하고 마주해온 코로나19이기에, ‘코로나 일상’에 적응해야 할 것으로 예측된다.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20학번은 ‘미개봉 중고’와 같은 별명부터 시작해 온라인상에서는 ‘학교에 가보지 못한 새내기’라며 유머거리가 되기도 했다. 인문융합자율학부 20학번 A학우는 1학기에는 대면수업을 기대하고 학생회비를 납부했지만, 코로나19로 학교에 가지 못하면서 2학기에는 학생회비를 납부하지 않았다. 작년 학생 사업은 대부분 비대면으로 진행되었지만 비대면 행사가 나름 이색 경험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의진(미디어컨텐츠융합자율학부 19) 학우는 미디어컨텐츠융합자율학부 학생회에서 진행하는 ‘야식 사업’과 ‘랜선 맥주 파티’에 참여했다. “특히 랜선 맥주 파티가 기억에 남는다”며 “직접 술자리를 가져 친목을 다지기 조심스러운 상황이라 아쉬움이 컸는데, 랜선으로나마 학부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의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좋았다”고 전했다. ‘코로나 일상’ 속 학생회에게 남겨진 과제 앞으로도 '코로나 일상'이 예견되는 가운데, 회대알리는 각 학부 학생회와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더 나은 한 해를 위해 어떤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지 얘기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올해 OT 및 새터 계획에 질문한 결과 모든 학부가 온라인으로 진행하며, 새터의 경우 기한이 남아 세부 논의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미컨학부) 비대위는 OT와 새터를 비슷한 시기에 진행하며, 구체적인 계획은 미정이다. 사회융합자율학부(사회학부) 비대위는 OT는 따로 진행하지 않으며 2월 24일에 새터를 계획하고 있다. 인문융합자율학부(인문학부) 학생회 OT는 2월 5일에 진행되며, IT융합자율학부(IT학부) 학생회 OT는 오는 1월 27일에 진행된다. 작년 학생회 사업에서 아쉬운 점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 사회학부 비대위와 인문학부 학생회는 “참여”라고 입을 모았다. 인문학부 학생회는 “전례없는 상황이었기에, 많은 사업들이 비대면 방식에 최적화되어있지 않았다.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한 사업을 고민할 것”이라고 답했다. IT학부 학생회와 미컨학부 비대위는 “소통”에 주목했다. 미컨학부 비대위는 “동기나 선배를 만나지 못한 게 아쉽다”며 “되도록 선배와 후배, 동기간의 교류를 중심으로 개선해나갈 것”이라 전했다. 작년, 코로나19로 무산된 신입생 프로그램 비대면 학생 사업으로 이어나가 반등 노력 올해 모든 학부 OT 및 새터 비대면으로 진행 학생회와 비대위, “소통”과 “참여” 강조 학생들에게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어떤 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냐는 질문에 IT학부 학생회와 인문학부 학생회는 “교육권을 보장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답했다. IT학부 학생회는 공대 계열 실습비 문제 등 다양한 사안을 지켜보고 있다. 인문학부 학생회는 수업권 침해 예방을 위해 인문학부 강의 모니터링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보궐선거 여부에 따라 활동에 변동이 있는 비대위 또한 계획을 밝혔다. 사회학부 비대위는 학생들의 소통 단절감 해소를 과제로 꼽았다. 이를 위해 인권 모니터링과 수업 모니터링 접수 창구를 마련하였고, 앞으로는 학우 분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미컨학부 비대위는 “코로나19 상황에 맞춰 캠퍼스 라이프를 조금이나마 보장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포부를 전했다. 학생사회, 코로나19 피해 회복하고 대안 찾는 한 해를 향하여 코로나19로 움츠러든 학생사회의 어깨는 여전히 봄을 맞이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뉴스1>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서울지역 대학 20개 중 11개 대학이 총학생회 구성에 실패했다. 학생들의 참여도 저조를 우려했던 각 학부 학생회와 비대위는 인터뷰 말미에서 학생들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했다. 학생들로하여금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흥미를 일으키는 비대면 학생 사업 속에서 학생들과의 소통이 필요한 상황이다. 작년 한 해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비대면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다면, 올해는 ‘코로나 일상’ 속에서도 대안을 찾고 회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작년 숭실대학교 총학생회는 설문조사를 완료한 학생들에 한하여 달력, 손소독제, 스티커 등이 포함된 키트를 증정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설문조사 참여 독려를 위한 유인책인 셈이다. 또한, 유튜브 LIVE를 통해 초청한 게스트와 학생이 소통하는 '랜선교양수업'을 마련하여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반전을 시도했다. <시민성 관점에 근거한 차세대 대학 학생회·학생자치 모델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던 예술대학생네트워크(예대넷)는 코로나19 이후 뉴노멀 담론 속에서 학생자치의 본질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했다. 예대넷 활동가 신민준씨는 "코로나19는 학생회 목적과 역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며 "학습권 침해나 등록금 환불 등에 잘 대응한 학교의 경우,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가 높았다"고 밝혔다. 학생회가 학생들에게 문제해결 창구로 인식된다면 학생회의 신뢰도 상승을 기대해볼 수 있다며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코로나19 이후 상황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시 예전(대면 상황)으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현재 코로나19 상황에서 학생회뿐만 아니라 동아리, 학회 등 학생자치활동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대책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글=방의진 기자(qkd0412@naver.com) 취재=용현지 기자, 방의진 기자
지난해 10월 31일 교육부가 공개한 대학공시정보에 따르면, 2019년 성공회대학교 학생들에게 지급한 장학금의 총액이 2013년 이후 처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성공회대학교 재학생들이 수령한 장학금 총액은 78억 5천만원으로 전년도보다 13억원가량 감소했다. 1인당 평균 수령 액수도 전년도 445만원에서 398만원으로 대폭 줄었다. 2018년 전국 평균 1인당 장학금이 334만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여전히 높은 액수지만, 성공회대학교 장학금 액수가 줄어든 것은 학교가 정책적으로 장학금 증액을 추진한 201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장학금 감소의 여파는 곧바로 2019년 장학금 지급 대상의 변화로 나타났다. 2018년까지 성공회대학교는 국가장학금 2유형을 통해 소득분위 6분위 학생들까지 전액 장학금을 받게 했으며 7, 8분위 학생들도 각각 100만원과 25만원의 장학금을 수령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2019년부터는 1~3분위 학생들에게만 전액 장학금을 지급했고, 그 이상 분위 학생들에게는 국가장학금 2유형이 지급되지 않았다. 성공회대학교 박상선 기획처장은 등록금심의원회에서 '인센티브 장학금'이 지급되지 않았기에 2019년 장학금 지급액이 감소했다고 밝혔다. 인센티브 장학금은 국가장학금 2유형의 일부로, 국가장학금 2유형 예산이 남을 경우 국가에서 각 학교에 배정해 주는 장학금이었다. 2018년까지 성공회대학교 학생들은 매년 인센티브 장학금을 받았지만 2019년부터 교육부가 이런 ‘남는 예산’을 만들지 않기로 하면서 성공회대학교의 장학금 액수 또한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이는 성공회대학교의 재정이 절대적으로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는 탓이 크다. 성공회대학교가 매년 지출하는 금액은 200억에서 300억 가량이지만 성공회대학교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내놓을 의무가 있는 학교 법인은 매년 2억원 남짓한 전입금(법인이 사립 학교 운영에 필요하여 투자하거나 지원하는 금액)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마저도 2019년에는 5천만원으로 줄어들었다.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은 성공회대학교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다. 이런 재정 상황 탓에 학교는 넉넉한 교내 장학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결국 교내 장학금은 등록금을 되돌려주는 꼴이기에, 학생들의 장학금 대부분을 국가장학금이 채워야만 했다. 성공회대학교의 재정이 넉넉했다면 국가장학금 예산이 줄어도 그 영향을 적게 받거나 학교가 국가장학금 예산이 줄어든 만큼을 교내 장학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장학금 2유형, 대표적인 정부의 책임 방기 이것은 학교와 학교 법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교는 학문을 발전시키고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공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사립대학교라 하더라도 정부의 지원과 협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국가장학금 정책은 사립대학교의 구조적 문제는 해결하지 않은 채 학생과 학부모의 등록금 부담만 줄이려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학교육연구소는 정부가 사립대학 재정 문제에 대해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2012년부터 시행된 국가장학금 2유형이 그러한데, 국가장학금 2유형은 등록금을 인하하거나 교내 장학금을 확충한 학교에만 주어진다.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게 하기 위해 학교는 등록금을 깎거나 교내 장학금을 증액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게 이 정책의 원래 취지였다. 하지만 국가장학금 2유형이 교육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학 재정 상황이 넉넉함에도 학생들에게 고액의 등록금을 받아 교육에 재투자하지 않는 경우에는 유의미한 정책일 수 있다. 하지만 성공회대학교처럼 재정이 넉넉지 않아 교내 장학금 확충이나 등록금 인하로 재정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 정작 교육이나 학교 인프라에는 충분히 투자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실제로 성공회대학교는 이 제도의 영향으로 2013년부터 매년 등록금 수입의 20%를 교내 장학금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3년에 총 16억 6천만원이었던 교내 장학금이 2014년에는 25억원, 2016년에는 35억 7천만원에 이르렀고, 국가장학금 교부액 또한 2018년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 결과, 앞서 지적했듯 성공회대학교의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학생복지처는 "국가장학금 2유형은 재학생의 '1인당 평균 교내 장학금 유지 또는 동결 & 등록금 유지 또는 인하' 조건을 충족해야 교부받을 수 있다"며 "재정 상태가 열악한 성공회대학교에서 등록금 인상이 12년간 동결되어 학교 재정이 매우 악화되었다"고 밝혔다. 학령인구 감소, 높은 등록금 의존 구조 개선해야 대학교육연구소는 대학이 더 이상 등록금에 의존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학령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함에 따라 등록금을 낼 학생들의 숫자 또한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소는 “우리나라 학생 1인당 고등교육 공교육비(국가가 부담하는 교육 예산) 지출액은 10,486$(한화 약 1,100만원)로 OECD 평균(15,556$,한화 약 1,700만원)의 2/3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며 “학령인구 감소라는 대외적 변화는 대학 재정에 대한 국가 책임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1학년도 성공회대학교 정시 경쟁률은 4.51대 1로 4.38인 전년보다 소폭 올랐다. 학교 측은 학령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인서울 4년제라는 특성으로 인해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학령인구 감소는 당분간 지속될 예정이고 더 이상 성공회대학교가 등록금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는 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전국 평균보다 높은 장학금을 유지하는 건 물론, 성공회대의 인프라 개선을 위해서는 학교 재단의 노력과 교육부의 결단이 필요해 보인다. 글, 취재=엄재연 기자(eomzkx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