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대학알리

박성빈의 시선

‘능력주의’는 착시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시대다. 능력의 유무 혹은 능력이 얼마나 계발됐느냐에 의해 개인의 성취가 가름된다. 성취는 보상으로 이어진다. 모두가 ‘0’에서 출발함을 전제하고 경쟁과 노력 여하에 따라 가장 능력 있는 이가 응당한 대가를 받는다는 식이다. 환경, 자본 같은 것들이 변수로 작동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결국 능력을 가진 이가 합당한 사회적 보상을 쟁취할 거란 기대다. 능력주의를 신앙처럼 떠 받드는 이들은 개인의 노력을 강조한다. 시련은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 같은 거다. 극복 가능한 시련만이 부여된다. 자수성가의 신화가 그것을 반증한다.


<정의론>을 썼던 하버드 대학 교수 존 롤스는 능력주의를 착시라 규정했다. 능력은 순전히 운에 의해 좌우된다. 태어날 때 이미 배당된다. 그건 계발한다거나 경쟁을 통과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게 아니다. 보통의 인간은 후천적으로 능력을 학습한다지만 능력을 계발할만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다. 환경 역시 운이다. 어떤 가정에서, 환경에서 태어날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다.

 


그는 고등학생 때 2주 인턴을 하고 의대 병리학 논문의 제1저자가 됐다. 논문 저자가 돼 본 경험을 비롯한 여타 스펙으로 고려대에 입학했다. 부산대 의전원에 진학해 두 차례 유급하고도 장학금을 지급받았다. ‘그’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이다. 사람들은 거기에 분개한다. 조국의 딸이 아니었다면 성립할 수 없는 인과라는데 분노한다.


분노는 온당하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그의 딸에게 화살이 겨냥 되는 것도 온당하다. 기회가 차별 없이 제공된다지만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가시화했다. 사회적 위계가 실재하고 그것이 학벌에서부터 태동함이 드러난 셈이다.


사회 부조리를 감각하여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적극적으로 발언했던 청년은 기득권이 됐다. 그 청년이 자기 기득권을 세습하기 위해 불공정한 수단을 동원했다는 의혹은 대중의 분노를 사기 충분하다. 분노의 기반엔 실망과 냉소가 있다. 그럼 그렇지. 개혁이나 청산을 구호로 외치던 당사자 역시 자기 테두리를 지키기 위해 혈안이었다. 척결하겠다고 다짐했던 부조리와 불합리를 동원하면서까지.


그리고 분노하는 이들 중에는 청년세대가 있다. 이들은 기성세대가 통과하라고 강요했던 ‘공정한 경쟁’을 온 몸으로 치르거나 치르는 중인 세대다. 분노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있다. 당신들이 공정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하는 시스템이어서 따랐다. 그게 정상이라고 간주돼서 정상 밖으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당신들은 우리를 기만한 셈이다. 위선자다. 서울대와 고려대는 지난 23일 ‘조국 사퇴’를 성명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동시에 이들의 반발엔 일종의 특권의식이 있다. ‘우리’는 공정한 경쟁을 거쳐 정당하게 학벌을 성취했는데 이미 주류에 안착한 이들이 편법을 동원한다면 ‘우리’가 거친 진정한 경쟁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맥락이다. 나는 그래서 지지할 수 없다. 좀 더 정교한 비판이라면 시스템에 대한 부조리를 발화해야 했다. 자국의 교육 시스템이 공정함을 거론할 차원이 못 된다는 언급이 필요했다. 계급 재생산이 학벌과 결부돼 있고 그 경쟁이라는 것 역시 부모가 소유한 자본에 의해 승패가 좌우된다는 맥락은 저들에게서 언급되지 않았다. 어쩌면 촛불을 킨 학생들 스스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학벌이 단지 노력과 능력에 의해 성취된 것만은 아님을.


롤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진정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선 ‘무지의 장막’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경, 성별, 부, 인종 같은 사회적 조건들이 개인의 기억에서 삭제되는 공간이 ‘무지의 장막’이다. 그 공간에서 토론이 개진된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가장 약자의 시각에서 공정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할 거다. 롤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롤스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가 언급한 ‘무지의 장막’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실현 가능성이 있느냐고 묻는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은 능력주의가 착시라는 롤스의 주장에 동조하게끔 만든다. 동시에 무지의 장막에서 토론하고 공정함을 수립하는 과정이 영원히 일어날 수 없겠다는 회의를 들게 한다. 기득권을 쥔 자들은 자신들이 공정한 수단을 동원했다고 믿는다. 그걸 놓지 않기 위해 애쓴다. ‘공정함’이 무엇인지 다시 논의돼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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