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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이후 10년, 바뀐 건 없다.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김예슬씨는 2010년 자퇴했다. 그는 대학 학업을 중단함이 아니라 거부한다고 말했다. 대학은 더 이상 배움과 진리를 가르치는 공간이 아니라는 언급이었다. 취업시장으로의 진출을 종용하고 기업이 원하는 인력을 기성품처럼 찍어내는 곳이 대학이다. 학생은 팔릴만한 인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의 상품가치를 저울질한다. 졸업장은 자신의 배움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기업에 입사하기 위한 당연한 전제로 변했다. 그리고 대학은 거기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그 흐름을 더 빠르게, 유장하게 만들고 있다.
 

 학생들은 자문할 수 없다. 자문해선 안된다. 편승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여기서 목소리를 내는 순간 레이스에서 이탈한다. 김예슬씨는 그 서글픔을 지적한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중략)... 그리하여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김예슬, <김예슬 대학거부 선언문>, 2010)”
 

 미디어와 기성세대는 김예슬씨에게 투사의 이미지를 덧씌우며 열광했다. “대학을 에워싼 사회 전체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며 김예슬 선언을 “전태일 분신 사건에,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에, 나아가 프랑스 68혁명과 같은 차원”이라고 표현했다. (한윤정기자,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김예슬 선언을 보는 두 가지 시선>, 경향신문, 2010.10.18.)
 

 기성세대의 열광엔 청년 사회에 대한 비난이 깔려있다. 자기세대와 다르다는 맥락이 내포돼 있다. 586세대는 기득권과 불합리에 투쟁하며 민주화를 쟁취했다. 그들이 시대 변화의 주체였다. 그러나 지금, 취업이 최선의 가치고 대학은 탈정치화 됐다. 청년은 거기 순응하며 자기 이익에 사로잡힌 비겁한 군상으로 변했다. 그들이 김예슬씨에게 열광했던 건, 김예슬씨가 이탈해서다. 트랙에서 이탈해 이 트랙에 문제가 있다고 역설해서다. 무엇보다 사회변화가 필요하다고 목청 높였던 자신들의 과거가 떠올라서다. 그리고 그 같은 의식은 질타가 돼 돌아왔다. 너희는 왜 가만있느냐.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푸른숲, 2010, p55)
 

 김예슬씨가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했을 때 노영수씨도 있었다. 노영수씨는 30미터 높이의 타워크레인에 올라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라는 현수막을 들었다. 노영수씨가 재학 중인 중앙대는 기업식 구조조정을 단행 중이었다. 77개학과를 46개로 통폐합하고 총장 직선제 폐지, 교수 차등 연봉제 전환 정책을 빠르게 통과시켰다. 그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와 여타 주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일은 없었다. “대학이 전인 교육의 장, 학문의 전당이라는 헛소리는 이미 옛 이야기이다. 이제 직업 교육소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중앙대 이사장 박용성씨가 2004년 서울대 초청강연에서 한 말이다. 노영수씨가 고공에서 현수막을 펼친 건 그래서다.
 

 중앙대는 노영수씨에게 퇴학처분을 내렸다. 김예슬씨는 대학 거부를 선언했고 노영수씨는 퇴출당했다. 둘이 말하는 맥락은 결코 다르지 않다. “대학이 기업화의 흐름에 오히려 편승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디어가 주목한 건 김예슬씨였다. 노영수씨가 왜 타워 크레인에 올라가 현수막을 펼쳤는지 묻는 언론은 없었다. 그의 퇴학에 문제제기하는 언론도 없었다. 김예슬 선언 이후 대학공간에 대한 담론이 쏟아졌지만, 공통적으로 언급된 건 김예슬씨 개인이다. 명문대와 엘리트 코스로의 진입을 자발적으로 거부한 청년의 용기에 대한 칭찬이 주류다. 그들이 주목한 건 ‘청년 김예슬’ 이라기보다 ‘고려대생 김예슬’이었다.

 

 그럼 노영수씨가 언급조차 되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고대생이 아니어서다. 미디어가 김예슬씨에게 주목한 건 엘리트여서고, 노영수씨를 호명하지 않은 이유는 대표자로서의 지위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체제 혹은 자본은 거대하고 당신 같은 ‘일반’ 청년이 구호를 내거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김예슬 정도의 ‘엘리트’가 돼야 구조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낼 수 있다.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는 거다.
 

 그러니 너희는 왜 가만있느냐는 지적은 온당하지 않다. 누군가는 김예슬씨의 자퇴를 숭고하다고 말한다. 동시에 노영수씨가 뭘 했는지 아는 ‘누군가’는 없다. 노영수씨의 발언은 김예슬씨와 똑같았다. 그럼, 지방대학생이, 고졸 청년이, 김예슬과 똑같은 맥락의 문장을 공표했다면 미디어는 투사 이미지를 부여했을까. 기성세대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을까. 엄기호가 쓴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 등장하는 진아씨는 자신이 대학거부선언을 했다면 “니가 얼마나 노력을 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란 비난이 돌아올거라고 말한다.
 

 같은 책에 등장하는 김예슬 선언을 보고 지혜씨는 불쾌하다고 말한다. “취업학교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대학교라지만, 난 이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의상을 공부하고 있다...(중략)...내가 24년동안 배워온 이분법적 사고로는 그녀를 칭찬하는 것은 그 트랙을 달리고 있는 나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제도권 교육 때까지 배운 건 빠른 속도로 질주하며 트랙에서 탈락하지 않는 법이고 그렇게 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쟁에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높은 서열에 오르는 법을 교육시킨 건 기성세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왜 분노하지 않냐고 비난한다. 정작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겐 관심조차 없거나 정치적 발언을 할 수준이 되냐고 묻는다. 
 

 김예슬씨 너머에 노영수씨가 있다. 엘리트 너머에 “우리”가 있다. 진아씨와 지혜씨와 더 많은 “우리들”이 있다. 김예슬씨와 노영수씨는 대학공간이 산업과 결탁하여 기업화를 촉발한다고 말했지만 그 너머에 엘리트 아닌 우리들은 대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성세대는 우리의 생각을 묻지 않았다. 분노하지 않냐며 비난하고 정치적 발언을 할 위치가 아니라는 재단 이전에 우리가 대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어야 했다. 대학의 정의에 대한 담론이 쏟아졌어도 우리의 의견을 헤아리는 담론의 등장은 드물었다. 우리는 대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돼야 하는가.

 

 

‘우리들’의 대학

 

 

 한서희씨(가명)는 항공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승무원이 되고 싶어서였다. 취업시장에서 여성이라는 지위가 분명 약점으로 작동할 거라 진단하여 여성 복지가 구체적으로 마련돼 있는 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항공사는 그런 곳들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다. 

 

 대학에서는 서비스 산업에 대해 배웠다. 승무원이 됐을 때를 가정한 실습도 병행됐다. 사람의 편의를 살피는 일이 서비스의 본질이라는 문장을 들었을 때, 이 일을 하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다.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려 애썼다. 잘하진 못해도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서비스와 그것은 유사해 보였다.

 

 대학은 확신의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구체적 배움을 제공하는 대학이 그래서 좋았다. 취업기관과 다를 바 없고 기업화 돼 간다는 비판은 온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미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는데 왜 대학이 거기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배움의 전당,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수사가 퇴색됐다는 비판을 보면 비판 같지 않았다. 상아탑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뜻하는 단어기도 하다. 4년 뒤면 현실에 내쳐질 판국에 4년 동안 진리만 탐구하는 일은 오히려 현실감각을 퇴화시키는 작업이 아닌가 묻고 싶었다. 실천될 수 없는 거창한 이론을 수업하는 것이야말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전상인씨(가명)에게 대학은 당연한 전제였다. 대학 졸업장을 취득해야 먹고 살 방편이 마련된다는 생각이었다. 거기 의문을 제기해 본적은 없다. 제도권 교육에서 끊임없이 주입받고 살아온 결과이며 눈에 보이는 구체적 실감이었다. 선생님도 학위가 있었다. 부모님도 학위가 있었다. 아르바이트 하는 곳의 매니저도 학위가 있었다. 어느 곳이든 뿌리내려 나를 돌볼 수 있을 만큼 노동의 대가를 받기 위해선 대학 학위가 필요했다. 

 

  대충 “삶의 철학”이라는 명칭의 교양 수업을 들은 적 있었다. 삶의 철학을 수업에서 배우는 게 우스웠다. 일상의 누적을 통해 자각하는 게 “삶의 철학”인데 그런 걸 일주일에 3시간 씩 누군가의 일방적 강의로 듣는 게 이해가 안 갔다. 그걸 공부하는 것도 우습고 시험을 보는 것도 우습다. 어쨌거나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졸업이 가능하여 듣긴 했다. 임상병리학을 전공하는 전상인 씨는 오히려 임상병리학 전공 수업을 듣는 게 훨씬 유익했다고 말한다. 임상병리학 같은 전공과목을 더 개설하고 유치하는 게 학생과 사회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도 첨언했다.

 

 그에게 대학은 배움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삶을 꾸리기 위한 생존의 문제였다. 때문에 대학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해본 적 없다. 거기서 마련해준 교육 과정을 밟고 취업하면 그만이었다. 

 

 한서희씨와 전상인씨가 말하는 맥락은 유사하다. 기업화 자체가 거대한 사회적 흐름이 된 마당에 대학 역시 거기 편승했을 뿐이라는 거다. 대학의 역사나 정의를 따지며 지금의 변화를 지적하는 건 불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직업에 대한 배움을 제공하거나 학위를 부여하는 곳, 그것 이외의 의미를 따지는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묻기도 했다. 이미 그렇게 됐는데. 대학이 취업기관처럼 변한 건 사회의 수요인 동시에 학생의 수요를 반영했기 때문이 아닌가.

 

 

대학은 기업이다 

 

 

 안지우씨(가명)는 국문과다. 문학이 좋았다. 글을 쓰고 싶었다. 영화든 책이든 어떤 종류의 예술이건 반드시 서사를 포함한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서사들이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서사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서사의 기반을 이루는 건 글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배우고 이야기를 쓰고 싶어 국문과에 진학했다. 

 

 진학하고 3년이 지나 국문과를 비롯한 인문대학 전체 학과가 예술대학과 통·폐합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한 겨를 없이 대학본부는 학과 통·폐합을 전제한 교육과정 개편안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반발했다. 해당 단과대학 당사자들의 의사를 묻거나 토론의 기회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의결 권한을 지닌 보직 교수의 협의를 거처 발표된 사안이라는 설명이 되풀이됐다.  

 

 지우 씨가 이상함을 감각한 건 그 때부터였다. 대학이 기업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그 때 들었다고 말했다. 기업은 위계를 통해 작동한다. 좀 더 높은 위치의 인간이 자기 의견을 확인받기 위해 회의와 토론을 가장한다. 회의와 토론 내용을 통해 의사 결정이 이뤄진다고 말하지만 의견을 내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들이 따로 있다는 걸 누구나 안다. 

 

 어쩌면 기업보다 지우씨가 재학 중인 대학이 더하다. 기업은 통보를 회의와 토론으로 둔갑하는 노력이라도 한다. 대학은 여타 주체들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 자체를 생략했다. 위계의식의 발로다. 대학이 학생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식이 아니라면 해당 단과대학 학생들과 논의하지 않고 통·폐합 개편안을 발표한 건 설명할 길이 없다. 

 

 통·폐합 개편안이 발표될 때 대학은 정부 재정지원 사업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결정이라는 설명도 동반했다. 재정지원 사업에 선정되면 학교의 명예가 높아질 테고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된다, 라는 식이었다. 

 

 기업에게 최고의 가치이자 목적은 이윤창출이다. 수익을 내 이득을 취하는 것이 기업 설립의 취지다.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재정지원 사업을 성취하는 일은 대학에게 좋은 일이다. 투자받은 금액만큼 재원이 늘어날 거다. 대학의 이득이다. 대학역시 기업의 취지와 비슷하게 작동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득을 취하는 일이 기업에겐 중요하지만 대학과는 별 관계가 없다. 법은 대학을 공공의 교육기관으로 명시한다. 공공의 교육을 수행하는 일엔 어쩔 수 없이 손해가 수반된다. 지우씨가 보기에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되리라”는 설명은 변명이다. 그걸 왜 학생의 의사를 묻지 않고 판단하는지 모르겠다.  

 

 대학을 기업처럼 학위를 판매하는 곳으로 가정해본다. 학생은 등록금을 지불하는 소비자인 셈이다. 기업은 소비자의 수요와 의견을 반영하여 전략을 짠다. 지우씨는 지금의 대학이 기업보다 이상한 시스템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학과 통폐합을 비롯하여 교수 및 교직원 구조조정, 총장선출방식 등에서 소비자인 학생의 의견을 듣는 일이 전무해서다. 

 

 

변한 건 없다. 논의의 장도 없다.

 

 

 김예슬 선언 이후 바뀐 건 없다. 정부와 대학은 성찰의 시늉만 했다. 교육부는 2017년 사회맞춤형 학과를 신설했다. 대학 교육이 취업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취지에서 수립된 제도다. 2016년엔 학사제도의 유연한 편성을 권고하는 방침이 발표됐다. 이를테면 전공 학부의 통폐합이 원활히 이뤄지도록 하는 방침인데, 이 같은 조치에서 어떤 학과가 통폐합의 대상으로 간주될지는 뻔하다. 중앙대는 2013년부터 비교민속, 아동복지, 가족복지, 청소년 학과 등 비인기 학과들을 상정하고 폐지하는 절차를 밟았다. 조선대는 물리학과를 폐지하고 인문대, 자연대 등에 속한 학과를 학부로 통합했다. 서울여대와 국민대는 대학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학과를 대상으로 통·폐합 논의를 진행한 사례가 있다. 강남대는 행정학과와 법학과를 통합해 공공인재학과를 만들었다. 대학의 설명은 한결 같다. “어쩔 수 없다” 학생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이 같은 일을 진행한 대학은 아주 많다. ‘아주’는 과장된 수사가 아니다. 정부는 대학의 기업화를 오히려 장려하고 대학은 이 흐름을 중단할 생각이 없다. 김예슬 선언 이후, 김예슬이란 청년 투사의 이미지만 남았다. 그가 대학을 거부한 맥락은 삭제됐다. 

 

 한서희씨와 전상인씨가 말했던 것처럼, 대학이 기업화되며 독단적 시스템을 구축한 건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을 따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회는 기업형 인재를 원한다. 생존은 취업의 다른 말이고 취업시장의 틀에 맞춰 학생을 가공하는 일은 오히려 학생이 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학은 논의의 장을 만들지 않았다. 고려대와 중앙대와 지우씨의 대학이 그랬던 것처럼 대학은 학생의 의견을 물어보는 절차를 배제했다. 모든 학생이 이를 원할 거라는 가정 혹은 학생은 정해준 절차를 따르면 그만이라는 의식의 발로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대학이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각 주체들이 토론하는 공간이 마련된 적은 드물다. 무엇보다 학생의 목소리가 중요하다. 대학이 기업화됐던 그렇지 않던 어쨌든 대학공간에 속한 절대다수이자 주인은 학생이다. 적어도 대학은 학생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그렇게 작동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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