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저.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과 지속되는 일상의 무기력함, 피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특별히’ 신경 써서 교정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로서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흔한 노력의 산물이며 ‘성장통’이라는 신화 속에서 정당화되고 일상화된다. 이러한 개인들의 일상은 흔히 아르바이트, 직장 생활, 학교생활 등등 여러 가지 개별적인 과정들에 의해 진행 되지만 그들은 모두 ‘피로’하다. 하지만 이러한 피로함을 그저 노력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 하는 긍정성의 언어들로 충분히 포섭하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개개인들의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적신호’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답은 ‘아픔과 자기파괴를 동력으로 삼고 노력하는 것’에 있는 것일까? 수많은 자기계발담론들 혹은 어른들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조언들은 보통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나도,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분명 좁아지는 취업시장의 문제로, 태생적인 가난과 물질적 빈곤으로, 학력이라는 상징자본으로 위치 지어지는 ‘위계’로, 다양한 정체성에서 소수자라는 이유로, 그들은 사회가 제공한 ‘자유로운 환경에서 마음껏 경쟁하라!’라는 명령아래 수없이 경합하
처음 ‘우울증’이란 단어를 마주한 건 10살 때였다. 학교에서 우울증 검사를 했는데, 반에서 내 우울 지수가 가장 높게 나왔다며 담임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는 엄마도 나도 그저 사춘기가 일찍 찾아온 거라 여겼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10살의 난 우울증에 시달렸던 게 맞다. 매일 어떻게 죽을지 생각했다. 당시 내가 사는 집은 아파트 4층이었고, 낮았다. 그래서 그때의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숨을 쉬지 않는 거였다. 방에 혼자 앉아 코와 입을 막고 숨쉬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숨구멍을 꽁꽁 막는다고 해도 인간의 자가 호흡 능력은 유효했다. 그래서 죽지 못했다. 22살이 되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 진단을 받기까지 꽤 많은 의사를 거쳤다. 네 번째 의사를 만나서야 확실하게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의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사람들이 힘들고 지칠 때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버티라고 하는데, 저는 도무지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지 않아요. 매 순간이 지겹고 끔찍했어요. 그저 꾸역꾸역 버틴 거예요.” 의사가 답했다. “만성이라 그래요.” 상담을 진행하면서 내 정서가 PTSD, 그러니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만성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 프롤로그 한국의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은 70%에 육박합니다. (e나라지표, “취학률 및 진학률(2015~2019)”) 이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치입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20대 초반의 나이면 ‘대학생’일 것이라는 인식이 당연하게 깔려있습니다. “어느 대학 다니니?”, “전공이 뭐니?”라는 질문은 실례이기보다 의례입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꾸준히 있었습니다. 몇 년 사이 페이스북에서는 ‘출신학교와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라는 문구의 자기소개가 유행과 의무처럼 번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문구 역시도 그들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만은 증명해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대학을 다니지 않는 청년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대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곤한 질문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왜 학교를 그만뒀어?” “무슨 일이야?”라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반면 대학생들은 “왜 대학을 다니니?”라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기 때문이죠. 대한민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삶을 ‘정상’이라는 틀 안에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사회에서 다름은 별남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 프롤로그 저는 어릴 때부터 얼른 스무 살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에게 스무 살은 '대학생'이었고,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스무 살이 되면, 아니 대학생이 되면 모두 부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멋지게 자신을 꾸미면서, 방학 땐 취미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 날 제 착각의 밑바탕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가야 한다’라는 인식이 깔려있습니다. 누구나 대학에 가는 줄 알았고,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고등교육기관 진학률은 70%에 육박합니다.(e나라지표, “취학률 및 진학률(2015~2019)”) 이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치입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20대 초반의 나이면 ‘대학생’일 것이라는 인식이 당연하게 깔려있습니다. “어느 대학 다니니?”, “전공이 뭐니?”라는 질문은 실례이기보다 의례입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꾸준히 있었습니다. 몇 년 사이 페이스북에서는 ‘출신학교와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라는 문구의 자기소개가 유행과 의무처럼 번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문구 역시도 그들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만은 증명해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대학을 다니지 않는 청년들이 존재합니다. 그
제 꿈에 솔직하지 못했던 스스로에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언론인을 꿈꿉니다.’ "전문대 간호학과랑 일반대 간호학과랑 같니? 급이 다르지." 동갑내기 나의 친구는 ‘너와 나’를 급이 다른 인간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지닌 우월감으로 우리를 짓밟아야만 당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나 봅니다. “웬만해선 전문대 학생보다 일반대 학생 뽑고 싶지. 걔네가 더 똑똑하니까. 하은 씨는 그나마 간호학과잖아.” 휴학 후, 외국에서 살아보겠노라 결심한 뒤 정착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약국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도 나는 좌절스러웠습니다. 며칠 전 일을 그만둔 아르바이트생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인력을 찾으시던 약사님께서는 전문대와 일반대 학생을 지적 수준의 차이로 평가하셨습니다. 왜 나에게는 ‘그나마 간호학과’라는 수식이 붙는 걸까요. 더 큰 사회로 나아가면 얼마나 더 좌절스러울까요. “경인교대 말고 경인여대? 전문대잖아. 그거 날라리 같은 애들만 모여 있는 곳 아니야. 꼴통들이지 꼴통들.” 숨통이 턱턱 막혔습니다. 어쩌면 이런 무시를 당하고 싶지 않아서 대학 입학 이후로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학점을 챙겼고 그래서 청춘을
모두가 알지만 드러나지 않는 공간 게시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배제를 집방 열풍이 보여주고 있다. '집방'은 '먹방', '쿡방'과 더불어 하나의 주요 방송 트렌드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코로나 19로 일상의 많은 것들이 변하면서, 또 다시 ‘집’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집을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들은 당대의 집에 대한 욕망을 반영한다. 내집 리모델링, 1인 가구를 위한 멋진 자취방, 집에서 대부분의 활동을 수행하는 트렌드를 반영한 집 정리까지. 가구 재배치로 넓어진 자취방 투어, 홈카페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인기 컨텐츠다. 이렇게 “집”은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그 열풍은 여전하다. 한편으로는 기묘하다. 좋은 삶, 멋지고 쿨한 삶을 비춰온 가운데 정작 현실은 없었기에. 아름다운 집, 상향평준화된 이미지에 포섭된 방은 넘치도록 쏟아진다. 반면 어떤 공간은 집에 대한 욕망보다 더 자명한 현실로서 있어왔는데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화면에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은 없다. 환상과 낭만으로 교차하는 집보다 더 가까이에 존재했을 거주공간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다만 불쌍한 이미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 빈약한 이해는 소확행, 케렌시아, 자기계발서
(1편에 이어서) 대학사회가 공정, 등록금 반환 문제로 뜨겁다. 그러나 오고 가는 주장은 때로 공허하게 느껴진다. 철저하게 가시화된 존재의 목소리만이 남아있는 토론의 장은 기존의 문법만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서울, 수도권 대학생의 공정만이 공정으로 인정받고 대학은 사회와는 분리된 고귀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쏟아지는 수많은 논의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전제는 무엇인가? 대학과 사회는 동떨어져 있는가? 대학과 사회와의 불가분함을 지적해야 하는 언론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기성언론의 목소리를 넘어 대학알리는 사회의 어떤 측면을 담아야 하는가? 대학과 대학언론, 그리고 기성 언론의 시각을 넘어 대학알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학생회장 최재식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3. 언론과 대학알리“고귀한 노동자? 낭만화된 시선은 시혜적 관점에 불과” Q. 언론이 대학생에게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A. 우선 대학생이라는 타겟을 설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론은 특수 이전에 보편을 말해야 하고 특수를 보편이 인정하게 해야하지 특수가 보편을 과대대표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너무나 자기들의…
대학사회가 공정, 등록금 반환 문제로 뜨겁다. 그러나 오고 가는 주장은 때로 공허하게 느껴진다. 철저하게 가시화된 존재의 목소리만이 남아있는 토론의 장은 기존의 문법만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서울, 수도권 대학생의 공정만이 공정으로 인정받고 대학은 사회와는 분리된 고귀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쏟아지는 수많은 논의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전제는 무엇인가? 대학과 사회는 동떨어져 있는가? 대학과 사회와의 불가분함을 지적해야 하는 언론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기성언론의 목소리를 넘어 대학알리는 사회의 어떤 측면을 담아야 하는가? 대학과 대학언론, 그리고 기성 언론의 시각을 넘어 대학알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학생회장 최재식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1. 대학 전반 Q. 대학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A. 오래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학이라는 사회를, 대학이 우리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기류다. 옛날에는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었고 그들의 사회 진보를 추동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격리였다면, 이제는 대학 정원이 늘고 대학 진학
작년 9월, 본격적인 가을을 앞두고 태풍 링링, 타파 그리고 미탁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13호 태풍 링링은 수도권과 충청·호남·제주지역, 17호 타파는 영남 및 제주지역, 18호 미탁은 호남·영남·제주지역을 강타했다. 세 태풍 모두 강력했지만, 어쩐 일인지 사람들의 관심은 유독 한 태풍에 쏠려있었다. 각 태풍이 기상청에 의해 한반도가 영향권으로 관측된 시기부터 벗어난 시간까지, N 포털 사이트에 각각 ‘태풍 링링’, ‘태풍 타파’, ‘태풍 미탁’으로 검색하고, 게재된 기사 수를 확인해보았다. 그 결과, 링링은 17,669건(9월 2일~8일), 타파는 8,764건(9월 19일~23일), 미탁은 12,130건(9월 28일~10월 3일)이었다. 태풍 규모와 검색 기간의 차이가 분명 존재하고, 검색어 역시 한 가지기 때문에 이 수치만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타파가 북상했을 때, 링링에 비해 잠잠한 언론에 대해 많은 사람이 불만을 표하여 ‘서울 공화국’ 문제가 다시 한번 수면위로 올랐다. 서울 공화국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따위의 모든 부분이 서울에 과도하게 집중된 현상을 비꼬아 이르는 말’이다. (출처 : 우리말 샘) 이런 신조
부모님의 지원을 받는 미성년자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회인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어른들은 말한다. 젊은 게 좋은 거라고, 아무 걱정 없을 때라고. 그 속 좋은 말에 대한 내 대답은 그저 허탈한 웃음뿐이었다.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 없었던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인 K 양(22)은 개강 이후 인천 본가를 떠나 교내 기숙사에 거주 중이다. 요즘 그녀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돈.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학생의 생활은 뭔가 다를 줄 알았다. 배우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배우고, 하고 싶은 건 전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방학을 맞아 떠나는 배낭여행을 꿈꿨으며, 학창 시절 공부를 핑계로 가지 못했던 기타 학원에 가려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상 앞에 앉아 핸드폰을 켜고 아르바이트생 구인 광고 목록을 뒤지는 것이 전부였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K 양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을 직접 만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속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가난한 대학생? “어쩌겠어, 나에게 허락된 천국은 알바 천국 하나뿐인데.” “나한테 시급 없이 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