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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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뷰] 사랑은 어쩌면, 가장 다정한 투쟁의 언어

'리뷰를 알리다, 알리뷰'는 다양한 필진의 리뷰를 통해 콘텐츠를 추천하는 회대알리의 기획입니다. 범람하는 콘텐츠들에 자꾸만 휩쓸려 나의 취향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이 표류 속에서 우리는 가끔 타인의 취향에 기대야 합니다.

 

영화_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한 인간과 가정의 이야기가 마을로, 지구로, 우주와 이웃 우주로, 우주의 우주로 확장한다. 휴먼 드라마, sf, 액션, 메타버스, 이민자 가족의 지독한 현실, 딸과 엄마의 관계, 각종 인간 사이의 갈등과 화해, 삶의 허무와 후회까지 전부 한데 모아 베이글 위에 올린다. 중간이 뻥 뚫린 원형의 베이글은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다. 허무와 실존의 모순을 전부 빨아들이는 블랙홀은 베이글의 형태로 상영된다. 이 영화는 미친 듯이 환상적이라서 현실이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현실적이라서 환상이다.

 

 

수만 갈래의 가능성과 현실

 

영화는 선택의 갈림길이 생길 때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평행우주를 제시한다. 선택의 순간마다 세계는 분열하고 우주는 새롭게 탄생한다. 가능성의 우주는 유리 조각처럼 깨진다. 그 분열의 파편은 가늠할 수 없는 곳 구석구석으로 튀어 있다. 양자경의 메타버스에서 모든 가능성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실현되고 있다.

 

만약 미래를 모두 파악할 수 있어 선택의 결과를 아는 사람은 늘 최선을 고르기만 할까? 과연 도착지를 파악한 채로 선택의 갈림길에 선 이는 항상 가장 지혜롭고 선하고 정의로우며, 책임과 용기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까? 미래의 불확실성을 걷어낸다면 현재의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무한한 평행우주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결국 존재가 몸 붙인 이곳, 현재의 가치를 말한다.

 

 

허무의 베이글

 

‘조부 투파키’는 평행우주를 멋대로 넘나들며 모든 것을 목격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물이다. 투파키는 자기 손바닥 위에서 겨우 작동하는 세상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한꺼번에 베이글 위에 올린다. 그리고 끝없는 공허를 감상한다. 수동적 허무주의의 바다로 정수리까지 입수하는 순간이다.

 

절대자 투파키는 본인의 깨달음과 허무를 함께 느낄 단 한 명의 존재, ‘에블린’을 찾아 헤맨다. 투파키는 에블린에게 선택은 미미하고 생명은 허무하며 세상은 ‘개허접한 쓰레기*’라고 말한다. 다들 미적지근한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이것 재고 저것 재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거듭하지만 결국 티끌에 불과하다고. 에블린이 보기에, 그 베이글은 그리 먹음직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만약 미물로 태어나 지구에 해만 끼치고 살아가다가 흙으로 돌아가므로, 인생에서 의미 따위 찾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 견해에 완전히 반대한다.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소중한 것들이 있다. 우리의 선택과 행위, 마음과 발언은 단발 – 종결 – 소멸하지 않는다. 입자인 동시에 파장인 빛처럼 삶은 이어지고 세상은 굴러간다.

 

* ‘개’ 등 비인간 동물을 명명하는 단어를 강조를 위한 접두사 등으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들의 이름과 존재는 너무 쉽게 물화 당하니까요. 비인간 동물을 나의 말에서까지 착취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입니다. 이에 공식 번역된 영화 대사를 그대로 인용했다는 변명을 덧붙여 봅니다.

 

우리는 가끔 허무주의에 빠지고는 한다. 내가 대체 왜 이런 고통과 상념을 안고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실체 없는 대상에 분노하고, 내 초라한 모습에 절망한다. 우리는 공허 때문에 삶을 어렵게 느끼지만, 또다시 허무 때문에 살아간다.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조금 더 사려 깊고 조금만 더 다정하기를 선택한다면? 달라진다, 분명히.

 

 

난 다시 태어난다면 -

 

에블린은 삶의 공허에 빠져 허우적대는 투파키(조이)에게 다정을 건넨다. 조이와 에블린, 그리고 모든 존재가 돌이 되어버린 세계에서도 에블린은 조이의 곁을 지킨다. 에블린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조이를 따라 구른다. 두 돌덩이는 그렇게 한참을 추락해 바닥까지 함께한다. 돌이 된 둘은 세상의 허무를 온몸으로 맞이하면서 가장 자유롭다. 허무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는 순간이다.

 

에블린은 '허무의 베이글' 속으로 도망치려는 조이를 끌어안고 현재에 머무르게 한다. 세상살이는 무의미하지 않다고, 너와 나의 지긋지긋한 상처와 결함까지도 다 사랑한다고 끈질기게 전한다. 세상을 전지적으로 휘저으면서, 에블린이 자기와 같은 것을 직면하고 느끼길 원하던 투파키의 욕심까지 포옹한다.

 

떠오르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전하고 싶던 많은 말씀을 담아 영화 시청을 추천했다. 몇 달 뒤 전화에서 그는 OTT로 영화를 봤다고 했다. 사실은 영화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반도 못 읽어내고 시청을 중단했다고도 했다. 듣자마자 진짜 이유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난해한 것을 좋아하고 이해하기를 잘하는 똑똑한 사람이다. 그가 이 영화 보기를 포기한 경위를 나는 안다. 언제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영을 종료했을지도 적중할 수 있다. 엄마가 부산에서 껐을 장면 뒤부터는, 내가 서울에서 재생했다. 직접 듣고 싶던 말을 돌멩이 에블린에게 전해 들었다. 돌들이 나를 감싸고 위로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에블린이나 웨이먼드였다가, 이 순간만은 조이가 된다.

 

 

다정을 검으로, 용기를 방패로!

 

에블린은 투사다. 모종의 목적 달성을 위해 열심히 싸운다. 싸움판이 깔리지 않은 순간에서도 에블린은 언제나 바쁘게 투쟁해 왔다. 일생이 투쟁이던 에블린은 절체절명 순간에서 총알을 장난감 눈알 스티커로 바꾼다. 매일 성가시게 만들던 웨이먼드의 눈알 스티커가 결국 에블린을 구한다. 총알은 무력이고 눈알은 다정이다.

 

총알이 눈알로 바뀌는 장면은 녹화해서 매일 아침 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치고받는 폭력을 장난과 다정의 방법으로 치환해 버리는 것, 그 모든 무지와 두려움에서 비롯한 압력을 조롱하듯이 무력화하는 것. 세상에서 숨 쉬는 방법은 아주 많다. 영화의 모든 순간은 다정하고 친절하게 삶을 살아가는 요령을 일러준다. 덜 싸우는 건 어려울지 몰라도, 사랑을 동력으로 싸우는 건 가능할 것 같다는 사사로운 용기를 얻는다.

 

 

글 : 동

편집 : 권동원 기자, 정인욱 기자

디자인 : 장채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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