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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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명수당을 바라보고 있을까

 

서울캠퍼스 교수학습개발원과 국제관 사이에는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 동상은 취하(醉霞) 박술음 선생(1902~1983)의 동상으로, 단과대학으로 시작한 한국외대의 첫 학장을 역임했던 그를 기리기 위해 동문들이 기금을 모아 2011년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외대를 설립한 창립자의 동상은 서울캠퍼스 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외대 발전에 기여한 초대 학장의 동상도 있는데 학교를 만든 이의 동상이 왜 없는지, 입학하고 캠퍼스를 거닐다가 한번쯤은 궁금증이 생긴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명수당에 위치한 김흥배 동상(출처 = 민중의 소리)

 

한국외대를 설립한 동원(東園) 김흥배(1914~1987)의 동상은 서울캠퍼스가 아닌 글로벌캠퍼스 내 명수당 잔디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동상이 글로벌캠퍼스에 위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생전에 글로벌캠퍼스에 대한 애착이 커서 명수당 앞에 동상을 세워 달라고 유언이라도 남긴 걸까.

 

외대 60주년 기념 동상 설치 계획…총학생회, 동문들의 반발

 

2014년 3월, 개교 6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한 학교는 동문들에게 기념행사 초청장을 보냈다. 문제는 행사 순서 중에 ‘김흥배 설립자 동상 제막식’이 포함됐다는 점인데, 이에 대해 일부 동문들과 서울캠퍼스 총학생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반발의 이유는 단 하나, 김흥배의 ‘친일행적’이었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 제작 당시 김흥배의 이름도 사전에 등재될 예정이었으나, 최종 등재 과정에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빠졌다. 동문과 총학생회의 반발에 학교는 “학교 법인인 동원육영회에서 동상 설립을 진행하고 있다”며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법인 측에서는 “설립자의 친일 행적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재를 털어 한국 최초의 외국어대를 설립한 공이 더 크고, 일제 강점기에 기업을 운영하면서 총독부가 만든 여러 관변단체에 이름을 올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동상 설치에 대한 명분을 언급했다.

여기서 짚고 가야할 점은 친일행적의 기준이다. 친일행위를 규명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나 간단히 나누어 보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한 소극적 친일파와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기득권이 되어보려 했던 적극적 친일파로 분류할 수 있다. 재단 측이 밝힌 대로라면 김흥배의 과거 행적은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한 소극적 친일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 그의 활동을 보면 소극적 친일파라 보기 어려운 행보들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의복, 철강 생산 사업으로 일제를 지원한 김흥배

 

1914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김흥배는 1928년 여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가게와 서적회사 등에서 일하며 돈을 모은 그는 1934년 ‘노다상사 주식회사’를 설립, 각종 잡화와 옷을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또한 1938년에는 지금의 마포구 아현동에 의복을 생산하는 ‘노다피복공장’도 세운다.

문제는 이곳에서 만들어진 의복이 기성복이 아닌 일본군을 위한 군복이었다는데 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전시체제에 돌입한 당시 상황에서 김흥배가 피복 생산으로 벌어들인 이익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분에 김흥배는 1942년 ‘동양철강주식회사’를 설립해 중공업 분야에도 뛰어든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직후 군수물자 생산에 모든 자원을 총동원한 일본이, 국가의 핵심산업이자 전쟁에 매우 중요한 철강업을 식민지 조선의 사업가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김흥배가 일제로부터 얼마나 신뢰받았던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경성부 의원, 국민총력연맹 이사 역임

 

철강업에 뛰어든 이후 김흥배는 더욱 노골적으로 친일 활동에 앞장선다. 동양철강 설립 1년 뒤인 1943년 그는 경성부 부회의원으로 당선됐는데, 부회의원은 오늘날의 시의원과 유사한 지위이지만 그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일제가 조선에게 형식적으로 자치권을 주기 위해 만든 역할일 뿐 실제로는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는 일종의 ‘거수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회의원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일본역사와 일본지리 등 조선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시험을 치뤄야 했으며, 나아가 독립운동이나 사회주의와 관련된 사상을 검증하는 과정도 거쳐야만 부회의원 출마 자격이 주어졌다. 이렇게 까다로운 절차들을 통과하고 부회의원에서 1등으로 당선됐으니, 그는 일본의 충신이 될 자격을 완벽하게 갖췄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김흥배는 부회의원과 함께 ‘국민총력 경성부연맹’의 이사도 겸임한다. 이 조직은 일제의 전쟁 승리를 위한 전시체제 기구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산하 기구로 신궁참배, 국민총진격대회 등을 개최해 조선인들의 전쟁의식을 강요하는데 앞장 선 단체이다. 단순히 친일 조선인들이 조직한 단체가 아닌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고위관료들부터 말단 관리까지 모두 포함된 집단이었다. “여러 관변단체에 이름을 올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하기엔 그의 이력이 너무나 화려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흥배 행적 추가조사 중…친일사전 포함될 것”

 

이 같은 친일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8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김흥배의 이름이 등재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현재는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을까.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외대알리와의 인터뷰에서 “2009년 이후로 친일인명사전의 내용이 업데이트 되지 않아 현재도 포함되지 않은 상태”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인명사전에 등재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친일 인물이 아닌 것은 아니며 김흥배 외에도 등재가 되지 않은 친일인물들이 많고, 사전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것이 친일행적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고 언급했다. 김흥배가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이름을 올린 친일 인물들은 중앙에서 활동한 인물들, 특히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들에 대한 조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며, 현재는 지방에서 활동한 인물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다”고 말하며 “등재 당시 김흥배에 대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내부 논의가 있어 등재 시기가 미뤄진 것일 뿐, 새롭게 발간될 친일인명사전의 개정판에는 김흥배가 추가될 확률이 높다”고 답했다.

즉 친일인명사전이 처음 발간된 당시에는 일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동조한 인물들이 먼저 등재된 것일 뿐, 현재 포함되지 않은 인물들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결론 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결국 김흥배의 등재는 친일 행적을 증명하는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서울캠퍼스 동상 설치 무산…방학 중 글로벌캠퍼스에 기습 설치

 

다시 2014년의 학교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전체학생대표자회의를 개최한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2014년 4월 11일과 16일 두차례에 걸쳐 김인철 총장에게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총장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동상 설치 진행’이었다. 60주년 기념행사 하루 전인 17일 새벽, 총학생회는 새벽 2시 즈음 캠퍼스 내에 동상이 들어올 것이라는 제보를 받고, 동상 설치 예정 부지를 점거했 다. 기념행사 당일까지 지속된 학생들의 농성으로 김흥배의 동상은 발도 들이지 못하고 갈 곳을 잃게 된다. 동상 설치가 무기한 연기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김흥배는 불과 3개월 뒤 외대에 다시 나타난다. 단지 장소가 서울캠퍼스에서 글로벌캠퍼스로 바뀌었을 뿐.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2014년 7월 29일, 당시 글로벌캠퍼스 중앙운영위원회는 학교 내 호수인 명수당 앞 잔디언덕에 동상 설치를 위한 터가 조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다음날 중운위가 동상 설치 반대 운동에 서명한 1000여명 학우의 인명부를 들고 학교에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돌아온 학교의 대답은 3개월 전과 같았다. “학교법인이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있고 동상과 관련해 전달받은 것이 없어 대책이 없다.”

 

명수당을 바라보고 있는 김흥배 동상(사진 = 외대알리)

 

결국 학교법인은 다음날인 8월 1일 새벽, 명수당 잔디언덕에 동상을 세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동시에 동상 훼손을 막기 위한 감시용 CCTV를 함께 설치했고, 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글로벌캠퍼스 관계자들에게 설치 사실을 통보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벌였다. 상대평가 전면 확대 시행과 재수강 횟수 제한 제도를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던 2014년. 학교는 또다시 학생들을 비롯한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동상 설치를 강행함으로써 ‘불통 행정’의 정점을 찍었다.

 

부글부글’ 반대운동…친일행적 알림판 제작

 

학교의 행보에 분노한 글로벌캠퍼스 학생들은 개강 직후인 2014년 9월, 김흥배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모임 ‘부글부글’을 만들고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에 나선다. ‘부글부글’은 동상철거를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대자보와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김흥배에 대한 학생들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집중했다. 당시 ‘부글부글’을 이끌었던 최한솔(루마니아 10)씨는 “유인물로만 상황을 알리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민족문제연구소’의 국장님을 연사로 모셔 김흥배의 친일 행각에 대한 심각성을 주제로 강연회도 열었다”고 당시 활동 상황을 설명했다.

 

 

2014년 10월 열린 동상 철거 문화제(좌, 출처 = 민중의 소리 ), 동상 옆에 설치된 김흥배 친일행적 알림판(우, 출처= 최한솔 학우 제공)

 

또한 ‘부글부글’은 집회도 열었다. 2014년 10월 7일, 명수당 앞에서 ‘동상 철거 문화제’를 개최, 설치를 비판하는 포스트잇을 동상에 붙이고 음악회를 진행하며 동상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강의실을 돌며 모금운동을 진행한 ‘부글부글’은 김흥배의 친일 행적을 알리는 ‘친일행적 알림판’을 제작해 동상 옆에 설치했다. 당시 글로벌캠퍼스 재학생 100명의 서명이 담긴 이 알림판은 2015년 초 학교가 일방적으로 철거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항의로 다시 설치돼 지금까지 김흥배의 친일행적을 알리고 있다.

 

동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4년이 지난 오늘, 김흥배의 동상은 여전히 명수당을 바라보고 있다. ‘부글부글’의 활동이 끝난 후 매년 글로벌캠퍼스 총학생회 후보들의 공약에 ‘동상 철거’ 항목이 포함됐지만, 실제로 이뤄진 적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그간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되고 비대위 체제가 들어서면서 동력이 약화된 점도 있고, 매년 굵직한 학내 이슈들이 많았던 탓에 동상 철거라는 주제가 뒤로 밀린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학교와, 동상 옆에 CCTV를 설치해 훼손하는 사람은 처벌하겠다는 학교 재단의 강압적인 태도가 철거에 제약을 건 것 또한 사실이다. 학생들의 목소리에 불통으로 일관하니, 학생들은 목이 쉰 채 지치고 결국 포기한다. 이것이 학교가 원하는 시나리오다. 그리고 항상 시나리오 대로 진행됐다.

그래서 김흥배의 동상을 단지 설립자의 동상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설립자가 친일파다”라는 내용으로만 기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김흥배의 친일 행위는 명백하며 이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데, 당연한 사실조차 외면한 채 원하는 대로만 밀어붙인 학교와 재단의 의도가 동상의 이면에 담겨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김흥배의 동상은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슬픈 오늘임과 동시에, 모든 학내 사안을 일방적이고 독단적으로 처리해온 외대 행정의 현주소다.

 

한달수 기자(hds802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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