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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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특집] 한글 눈보신 ② 현대 한글의 아-트를 봐줘


올해도 아-재 꼰-대들이 한글과 한국어도 구분 못 하고 "니네 내가 못 알아먹는 은어 쓰지 말라능!" 광광 우는 한글날이 돌아왔다.  이런 것만 보면 한글날은 "은어 쓰지 마" 빼면 할 말이 없는 날 같다. 심지어 사회적 방언의 생성과 유통을 포함한 언어의 변화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그렇다.

한글날인데 "은어 쓰지 마" 말고는 할 말이 없는 아저씨들, 한글의 멋짐을 모르는 아저씨들은 불쌍해요. 예쁜 한글, 멋진 한글, 보기 좋은 한글은 우리 사는 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미치고, 생각보다 엄청 중요하다. 글꼴 없는 현대인의 생활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도로의 교통표지판 글씨도 글꼴이며, 책에 쓰인 문자의 모양도 글꼴이다. 문자 없는 현대문명을 상상할 수 없듯 손으로 쓴 것을 제외한 모든 문자는 글꼴에 기대어있고, 글꼴 없는 현대 문명도 불가능하다. 이런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수업시간 교수님이 만들어온 PT의 앞장과 뒷장이 다른 두서 없는 글꼴과 구린 '굴림체' 글꼴은 우리의 안구와 정신건강을 해친다.

그래서 광광 우는 아-재, 꼰-대들을 제쳐두고, 한글날 눈보신이나 좀 해보려고 한다. 한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온갖 예쁜 것들, 멋진 것들이나 구경하자 이거다. 한글날이라면 마땅히 한글의 멋짐과 예쁨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예쁜 한글' 특집, 한글 눈보신 특집 두 번째는 현대 타이포그래피이다.


PART1. 한글로 예술하면 외않된데?

1. 안상수체(1981)와 한글 만다라(1988)


ⓒ안상수, <안상수체 모듈>. 출처: typolover.com
 

'안상수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아래아 한글'에 번들로 삽입되어 남녀노소 누구나 보고 쓰면서 자란 글꼴이 바로 안상수체니까. 지금에 와서는 촌스럽다. 안상수체로 제목을 쓰면 잡지 '좋은생각' 같은 올드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 안상수체가 글자 자체로도 예술이고, 이 글자를 토대로 예술작품까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안상수체'는 1981년 개발된 한글 세벌식 글꼴이다. 가끔 포스터의 제목 글꼴로 쓰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지만, 사실 본문 글자로 쓰기엔 빈말로라도 가독성이 높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본문용 글꼴로 쓰기 불편하다고 안상수체를 치워버릴 일만은 아니다. 이 글꼴은 한글의 조형원리를 디자인적으로 구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안상수, <한글 만다라>. 출처: egodesign.ca

 

안상수체와 <한글 만다라>는 한글의 두 가지 측면을 각각 하나씩 극명하게 보여준다. 첫째는 의도에 따라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문자라서 그 형상에 글자의 원리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안상수체는 한글 자모의 기본 형태만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인 글꼴은 '가방'을 쓸 때의 'ㄱ'과 '글자'를 쓸 때의 'ㄱ'과 '감정'을 쓸 때의 'ㄱ'이 다 다르다. 반대로 안상수체는 '가방'을 쓰든 '글자'를 쓰든 '감정'을 쓰든 똑같은 'ㄱ'을 쓴다. 초성(자음)과 중성(모음)과 종성(받침 자음)의 결합이라는 한글 쓰기의 원리를 그대로 가져다 붙인 글꼴이 안상수체다.

 

ⓒ안상수, <한글 만다라>. 출처: egodesign.ca

 

안상수체의 한글로 그린 포스터 <한글만다라>가 보여주는 한글의 두 번째 측면은, 이것이 글자의 '꼴'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글만다라>는 문자의 형태와 그 문자가 가리키는 바를 완전히 분리하여 글자의 형태만을 남기고 이 형태로 심미성을 추구한다. 뜻은 아무 것도 없지만, 형태는 분명하게 한글이다. 한글의 형태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2. 이재만, <소금 꽃이 핀다>
기원전 2세기 중국, 한나라. 황제는 '염정(鹽政)'이라는 관청을 설치해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도맡아 할 것을 지시했다. 소금은 화폐이기도 했다. 이 소금을 만드는데는 엄청난 노동이 소모됐고, 그래서 더 귀했으며, 소금에 관련된 민간신앙도 있었다. 이런 소금의 생활문화사를 집약한 전시가 2011년의 국립민속박물관의 '소금꽃이 핀다' 展이고, 지금 보는 이 포스터가 그 전시의 포스터다.


ⓒ이재만, <소금꽃이 핀다>. 출처: studio fnt 페이스북

어떤가, 글자가 꼭 소금 결정 같지 않은가?

염전의 바닷물에서 소금 결정이 엉기듯 네모난 알갱이가 모여 글자를 만든다. 전시의 제목 '소금꽃이 핀다'는 염전의 노동자들이 바닷물에서 소금결정이 엉겨 하얗게 말라붙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소금꽃이 피듯 글자가 피었다. 이 포스터와 포스터 디자인을 활용한 패키지는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인 Core77 어워드에서 'PROFESIONAL RUNNER UP' 부문을 수상했다. 사실 이게 무슨 상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3. 그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 출처: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캠페인 페이스북 페이지

어느 스튜디오의 누가 만든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도발적이고 전복적이다. 요즘 유행하는 복고적 글꼴에 도발적 문장이라는 트렌드에도 부합한다. 무엇보다, 이건 페미니즘을 위한 예술이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5년 연중 캠페인, 2016년 회원 확대 캠페인을 통해 쭉 사용하고 있는 이 타이포그래피는 기존의 여성혐오적 시각과 "그럴 수도 있지"라고 무마하는 기득권의 권력에 태클을 건다. 하나씩 찍은 방점은 딱딱거리며 따지고 덤벼드는 목소리를 연상시키고, 두툼한 복고풍 글씨는 힘이 있다. 게다가 이 타이포그래피 작품을 보고 있으면 멀쩡하게 글자를 읽어놓고도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데, 글자 일부가 뒤집어진 타이포그래피 전체를 거울에 반사시키듯 한번 더 뒤집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뭐가 옳은 방향인지, 어느 글자가 어떻게 뒤집혀 있는지 확인하려면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야 한다. 글자를 뒤집음으로서 보여주는 전복적인 분위기, 그 전체를 한번 더 뒤집음으로서 만들어지는 낯설음(낯설게 하기)은 어떤 여자의 말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여자냐면, "우리는 이제까지 여성혐오적 시각과 이를 합리화하는 '그럴 수도 있지' 아재들에게 파묻혀 우리의 시각을 지키지 못했으며,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시각과 우리의 목소리를 가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여자다.

 

참고로 한국여성의전화는 이 작품을 소재로 많은 굿즈를 내어놓았으니, 질러라! 그리하면 한 때의 기쁨과 다음 달 알바비 들어올 때까지의 텅장을 얻게 될 것이다.


PART2. 캘리그래피의 세계
캘리그래피는 타이포그래피와는 다른 영역이다. 하지만 한글의 멋짐과 예쁨을 말할 때 어떻게 한글 캘리그래피를 빼놓고 얘기할 수 있겠나. 한글 캘리그래피는 서예의 전통 위에 있어 영문 손글씨 캘리그래피보다 더 다채롭고 생동감 넘친다. 한글 캘리그라피는 붓과 먹, 서예의 느낌과 회화의 느낌이 뒤섞인 근사한 세계다. 게다가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 쓰는 문자이고 자기만의 독특한 배열을 구성할 수 있어 캘리그래피에 특히 적합하다.

특히 요즘은 손글씨 열풍이라도 부는지 캘리그래피를 배워보겠다는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캘리그래피 교본도 많다. 서점의 평대서가 하나를 다 차지할 정도다. 나의 취미도 캘리그래피인데, 교본을 따라 쓰려면 준비물이 너무 많기도 하고, 남의 글씨를 따라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아 그냥 혼자 쓴다. 취미로 해볼만한 예술 중 하나다. 근사하게 하나 써서 주변 사람한테 선물하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1. 배우 조달환


 

배우는 생각보다 책을 많이 읽는 직업이다. 배우에게 주어지는 대본을 그들은 '책'이라 부른다. 그 책을 읽지 못하면 배우생활에 치명적이다. 글자를 배우지 못했던 성룡이나 난독증을 가진 톰크루즈는 대본을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했다. 배우 조달환은 다른 방식으로 극복했다. 캘리그래피다. 배우로 활동하는 중에 어느 날 난독증이 생긴 조달환은 난독증 치료를 위해 캘리그래피를 시작했다. 취미로 시작한 캘리그래피로 이제 어엿한 개인전을 여는 작가 수준이 됐다. 그가 출연한 드라마 <천명-조선판 도망자 이야기>(KBS2TV)와 <감격시대-투신의 탄생>(KBS2TV)의 타이틀은 조달환이 썼다.

2. 강병인

http://www.sooltong.co.kr/
캘리그래피를 직접 하는 것도 좋지만 감상하는 것도 좋다. 강병인은 <송곳>(JTBC), <미생>(tvN), <정도전>(KBS1TV) 타이틀 등 서예에서 출발한 묵직한 글씨로 유명한 캘리그래퍼다. 신해철 유고집 <마왕 신해철>의 표지 글씨도 그의 작품이고,  캘리그래피 연구소인 '술통'을 운영하고 있어 이곳에서 양성한 전문작가들과 합동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의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면 이제껏 그가 작업해온 포트폴리오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상업 용도가 아닌 순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PART3. 키네틱 타이포그래피
키네틱 타이포그래피는 독특한 장르다. 원래 문자는 지면에 고착되어 움직이지 않고, 시간성과 공간성도(디자인적 개념이 아닌 일반적인 공간성을 말한다) 없다. 그러나 영상과 결합한 키네틱 타이포그래피에는 시간성이 있고, 공간성도 있다. 글자가 기표라면 그 글자가 가리키는 뜻은 기의다. 그런데 글자가 그 뜻을 형상화할 수 있을까? 키네틱 타이포그래피에서는 가능하다. 글자가 태어나고 움직이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키네틱 타이포그래피는 타이포그래피의 많은 영역 중에 가장 최근에 탄생했고 아직 한글 키네틱 타이포그래피는 대단히 발달한 상황도 아니다. 아마추어 영상 편집자들이 취미로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 명대사나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짧게 만드는 정도다. 특히 모션그래픽 디자이너들이 겸해서 키네틱 타이포그래피를 만드는 경우가 많아 문자로서의 특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만들어진 작품이 많다. 그렇다 해도 역동적인 문자, 움직이는 문자, 뜻을 형상화하는 문자란 신기하고 매력적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뭔가 대단한 거 같은데 무슨 말인지는 이해가 잘 안 되겠지.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보자.


1. 악동뮤지션의 노래들


악동뮤지션의 노래 가사는 독특한 말맛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그 말맛을 영상으로 표현한다면? 길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보면 알게 된다.

2. 인피니트 <몬스터게임>

괴물의 이빨이 타이포그래피를 부수는 움직임, 노래 가사가 '숨는다'고 할 때 함께 숨는 글자의 움직임이 훌륭하다.

3. 에픽하이, <본 헤이터>

키네틱 타이포그래피를 포함한 모든 모션그래픽은 정말 쌩노가다의 산물이다. 잔손이 어찌나 많이 가는지 이루 말로 설명조차 못 한다. 그래서인지 노래 전체를 키네틱 타이포그래피로 만들어낸 작품은 많지 않다. 영상 편집을 해본 사람이라면 저 긴 노래의 숨가쁜 랩을 영상으로 만들어낸 저 노력에 절로 고개를 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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