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4 (일)

대학알리

알리가 본 세상

독백 ; 안녕하세요. '노동자' 나이팅게일입니다.

 

백 ; 안녕하세요. 노동자’ 나이팅게일입니다.
 


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2학년이 되어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했습니다. 부모님, 교수님, 동기 앞에 서서 나이팅게일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백의(白衣) 천사’ 간호사를 꿈꾸며 간호학과에 입학하긴 했지만 막막한 현실이 먼저 눈앞을 가립니다. 과연 희생정신, 사명감 그리고 헌신만으로 버텨 낼 수 있는 직업인지 모르겠습니다. 희생이기 이전에 나의 생계를 위한 직업이라는 현실 앞에 나이팅게일 선언문은 막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선언문으로써 우리의 불합리한 노동이 고급스럽게 합법화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랜시간 병원에서 실습을 하며 쉴새 없이 움직이는 간호사 선생님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오늘도 한 평 남짓 되는 좁은 처치실 한편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시는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차마 “저 식사하고 와도 될까요?”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간호사는 근무시간 내내 쉴 새 없이 뛰어다녀도 늘 시간이 부족해 추가 근무를 하기 일쑤입니다. 추가 근무 수당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희생이기에 추가 근무 또한 보수 없는 희생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도 축축해져 가는 생리대를 갈아 치우지 못하며 보수 없는 추가 근무까지 해냅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이러한 불합리한 노동이 나이팅게일 정신으로 포장되어 ‘백의(白衣) 천사’로서 당연한 게 되어있었던 것은.
 
늘 스스로를 자책하는 질문을 던져야만 했습니다. ‘간호사가 부당한 노동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욕심인지.’ ‘과연 나는 의료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욕심 많은 인간인지.’ 간호사는 늘 희생이어야 할까요. 일한 만큼 보수를 받는 것, 법적으로 보장된 최소한의 휴게시간을 누리는 것, 생리 현상을 해결할 최소한의 시간을 갖는 것, 누군가에겐 당연한 권리이지만 우리에겐 ‘욕심’이 되었습니다. 간호계의 간호 수가 인상,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두고 사람들은 ‘밥그릇 싸움’이라며 비판합니다. ‘밥그릇 싸움’이 맞습니다. 그게 나쁜 건지 모르겠습니다. 노동한 만큼의 대가를 받고 싶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고 싶은 생존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의 노동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밥그릇 싸움은 마치 생명을 두고 위협하는 인질극으로 내비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노동이 그러하듯, 우리의 노동도 생존이며 생계입니다. 희생이기 이전에 내가 살아남기 위한 또 하나의 노동입니다.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이 일에는 ‘나’라는 주체는 사라집니다. 오직 ‘남’을 위한 봉사자로, 조건 없는 희생으로 기억됩니다. 간호대 4년 동안 간호의 덕목은 희생과 헌신으로 가르침 받아 왔지만, 내가 살고 싶어 남을 살리는 또 하나의 노동임을, 당신과 같은 또 하나의 노동자임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이팅게일을 ‘등불’을 든 ‘백의의 천사’로 기억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 나이팅게일은 의료물품 보급에 문제가 생기면 ‘등불’ 대신 ‘망치’를 들고 직접 창고의 문을 부수는 ‘백일의 전사’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간호사라는 전문직은 ‘등불’을 든 백의의 천사라는 프레임에 갇혀 친절과 희생을 강요받곤 합니다. ‘천사’로 기억되고 싶지 않습니다. ‘전사’로 기억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으며 일하는 당신과 같은 ‘노동자’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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