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목)

대학알리

박성빈의 시선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가족과 돌봄 ①>

 

 

 고함이 나서 이어폰을 뺐다. 아빠와 할아버지가 싸우는 소리였다. 문을 열었다. 내가 있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싸우는 게 아니었다. 아빠는 혼나고 있었다. 핸드폰 요금이 10만 원 넘게 나왔다는 이유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절박했는지 무릎을 꿇었다. 모멸의 언어가 아빠에게 달라붙었다. 고성과 모욕이 몇 번 더 오갔다. 마흔 넘은 아빠는 일흔 넘은 할아버지에게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라는 문장을 되뇌었다. 그걸 주문처럼 외웠다. 모멸이 격발되는 건 잠깐뿐이라고 스스로 되새기는 것처럼 보였다.

 

 핸드폰 요금이 명시된 고지서를 봤다. 핸드폰 요금이 10만 원 넘게 지출된 건 교통비 때문이었다. 그때 아빠는 교통비를 낼 형편도 못돼서 핸드폰 요금으로 대중교통에 탑승했다. 고지서는 아빠가 끊임없이 이동했다는 증명이었다. 모욕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딘가 자기 가치를 알아줄 곳에서 노동하기 위해서였다. 몇 평의 방에서만 삶의 궤도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빠는 그걸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빠가 정말 무능한 인간인지, 뭘 했고, 뭘 하고 싶은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빠, 라고 발음해 본 적도 없다. 어쩌다 방에 들어가면 나가라고 닦달하는 인간이 그였다. 알파벳 가르쳐 주는 일을 귀찮아하는 사람이었다. 아빠를 싫어했다. 경멸했다. 동정했다. 고등학생 때는 아빠 지갑을 뒤졌다. 나도 누군가에게 용돈이란 걸 받고 싶었다. 아빠는 한 번 인상을 쓰고 말았다. 모른 체하는 게 아니었다. 훈계나 조언, 추궁 중에 어떤 언어를 골라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빠는 자녀의 기분을 헤아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자녀와 친밀감을 쌓으려 시도한 적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가정을 이룬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룬 뒤의 책임과 여파는 자기와 무관하다는 듯 굴었다.

 

 자녀의 대학등록금은 마련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빠는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거기서 일하다 병원에 입원한 때가 있었다. 나는 아무 기분도 들지 않았다. 걱정하고 유념하는 시늉을 해야 하는지 자문하지도 않았다. 찰나의 일상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병원에서 아빠는 종종 전화를 걸었다.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래도 받아야 하지 않으냐, 고 물었다. 받아서 무슨 말을 해? 우리는 전화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떤 “사이”라고 호명할만한 관계가 못됐다. 자기 아픔을 위로해 줄 자녀의 역할을 기대해서 전화한 거라면 나를 귀찮아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가라고 닦달하지 말았어야 했다. 가정을 이룬 뒤의 책임과 여파를 감당하려 노력했어야 했다.

 

 성인이 되고, 내가 아빠와 이어져 있다는 게 종종 상기됐다. 그의 노동에 의존한 때가 한 번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좌표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학교 준비물을 빼먹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대학 근처에 방을 얻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것, 밥값이 궁해본 적 없던 것들 모두 아빠 덕이었다.
그러나 내가 울고 싶을 때 곁을 내준 이는 그가 아니었다. 고립된 것 같은 감각에 몸서리칠 때 위로해준 이는 그가 아니었다. 내게 특별한 호명을 부여하며 자존감을 길어 올려준 이 역시 그가 아니었다. 아빠와 이어진 끈은 부채감이지 유대감이 아니었다.

 

 종종 아빠가 무릎 꿇고 우는 장면이 지나간다. 아빠 전화를 무시한 순간이 이어진다. 그는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가족 관계 내부의 인원들이 서로에게 필수적으로 치러야 할 의무가 돌봄이라면 그에게 돌봄이 필요한 순간이 닥칠 때 나는 그를 돌볼 수 있을까. 그는 내게 가족이라기보다 같은 집에 동거하는 “누군가”였다. 내가 그를 돌봐야 하는 이유는 가족 간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자립이 요원할 무렵 그의 경제력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그때 받았던 것들을 보상한다는 감각으로 그를 돌볼 테다.

 

 가족관계를 보상과 거래의 맥락으로 해석하는 내가 어딘가 뒤틀려 있는 게 아닌지 되뇌었다. 그와 나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지만 나는 아빠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다. 가족이라서 당신을 사랑해야 하고, 가족이라서 당신을 돌봐야 한다는 설명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이런 생각은 비겁한 태도의 일종일까. 나는 위화감이 들었다. 이 위화감을 설명하고 싶었다.
 

 

당신을 사랑해서 돌봤다

 

 
 김진주 씨(가명)는 2018년 엄마를 간호하기 위해 휴학했다. 암이 재발했다는 진단을 듣고 나서였다. 내 일상을 지키는 것보다 엄마와 함께하고 싶었다. 간호인을 고용하거나 복지 시스템의 돌봄 지원을 받는 일은 선택지에서 배제했다. 가족이기 이전에 친구였다. 같이 몸을 가누고 부대끼면서 서로의 역사에 흔적을 새긴 관계였다. 당연히 엄마를 돌봐야 했다.

 

 엄마를 돌보는 일은 가족의 당위였다. 이모와 할머니도 엄마를 간병했다. 엄마를 돌보는 일 때문에 충돌하는 경우가 잦았다. 항암치료의 주기나 실천 여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진주 씨와 아빠는 아픈 엄마의 호소대로 하는 걸 우선으로 삼았다. 이모와 할머니는 항암치료와 수술은 필수인 절차라고 여겼다. 진주 씨는 엄마가 어떻게 아파하는지 봤다. 살갗이 검어지고 의식을 잃는 경우가 빈번했다. 울고 찡그리고 아프다고 소리치는 것 모두 실재하는 고통이었다. 고통과 별개로 엄마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을 생각할 수 없게 됐다. 생존하려면 고통이 동반됐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진주 씨는 이모와 할머니를 외가로 돌아가게 했다. 엄마를 간병하는 일은 가족의 영역에서 진주 씨 가정의 영역으로 축소됐다.

 

 진주 씨는 2018년을 힘들었을 때로 회고했다. 각오가 무색했다.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간헐적으로 일었다. 엄마의 죽음을 상상한 때도 잦았다. 엄마는 의식이 점점 증발했다. 암이 뇌까지 전이돼 현상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일을 힘들어했다. 고속도로를 이동하던 와중에 폐쇄된 공간이 답답하다며 차 문을 여는 일도 있었다.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밖에 먹고 씻는 일 모두 힘들어했다. 자다가 깨 간병이 필요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진주 씨는 ‘나’라는 개인이 없어지는 때였다고 말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감각으로 엄마를 돌보는 일에 주저 없었다. 그런데 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엄마를 돌보는 것과 더불어 집안 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어린 동생을 살피는 일 역시 자기 몫이었다. 외출하면 대충 눙친 일들이 지속해서 환기됐다. 가족이니까, 가족이라서 치러야 할 의무의 목록들이 늘어갔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과 엄마의 죽음을 상상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엄마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게 받았던 보살핌과 사랑을 양분 삼아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신에게 보살핌이 필요한 순간 왜 내가 그 필요를 감당해야 하는지 자문하고 회피하는 건 합당하지 않다. 진주 씨는 엄마를 사랑했다. 자기 가족을 도외시할 수 없었다.

 

 엄마가 죽고 진주 씨는 동생 때문에 울었다. 동생은 엄마의 상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나잇대에 받아야 하는 돌봄과 사랑에 공백이 생길까 봐 걱정스러웠다.

 

 진주 씨는 엄마를 가족이라서 돌봤다고 말했다. 어떤 자원을 교환하는데 계기나 의문이 필요 없는 관계가 가족이라는 생각이었다. “가족이라서 돌봤다”는 문장엔 그들을 사랑한다는 의식이 전제돼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일이 책임이 아니라 당위인 셈이다.

 

 그런 적 없음에도 가족을 사랑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가족 간의 사랑이 없음을 쉽게 전제하지 못한다. 진주 씨는 나와 달랐다. 나는 종종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사랑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누군가 물으면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본능이나 감각으로 느껴본 적 없기에 공허하다.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 감각이 아니라 책임처럼 느껴진다. 책임감으로 가족을 사랑해야 할 것 같다. 당연히 가족을 사랑해야 할까. 그들을 돌보는 것도 그래서 당연한 걸까.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조기현 씨는 8년간 아빠를 돌봤다. 그 돌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출판했다. 엄마와 동생이 있었지만 이혼하고 못 본 지 오래다. 아빠와는 가족이라기보다 동거인의 관계였다. 조기현 씨는 돈을 벌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나서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각자의 생계는 각자가 책임졌다.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았다.

 

 아빠의 삶에 개입하게 된 건 아빠가 알코올성 치매를 진단받고 난 이후부터다. 스무 살 때 아빠가 처음으로 쓰러졌다. 의료 체계는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는 나이를 만 24살 이상으로 규정했다. 보호자 등록 절차가 거부됐다. 아빠와 같은 현장에서 근무하던 동료를 호출해 입원 절차를 밟았다. 1인분도 벅찼던 생계는 2인분의 몫까지 확장됐다. 병원은 정확한 진단명을 파악하기 어렵다며 보험 적용이 불가능한 진료를 권유했다. 비용은 가늠할 수 없는 규모로 불어났다.

 

 국가 정책의 도움을 받기 위해 복지과를 방문하지만 거기서 조기현 씨는 행정의 대상으로 취급됐다. 이만큼 어려운 형편이라고 호소하면 당신의 호소를 증명하는 구체적 자료가 첨부돼야 한다는 식이었다. 가난은 무능으로 치부됐다. 도움이 필요한 당사자가 아니라 복지정책의 수혜자라는 태도였다. 내가 겪는 가난이 복지 시스템의 지원에 포함될만한 수준인지 자문해야 했다. 가난과 빈곤은 검열됐다. 점수가 매겨졌다. 그것 자체가 모멸감을 주는 일이었다.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할 때엔 수입이 일정 기준을 초과했다는 이유로 재원 수급이 거부됐다. 전역하고 적은 월급의 시민단체에서 일하니 차상위 계층으로 선정돼 후원물품이 공급됐다. 이미 보증금을 반 이상 지출하고 모았던 돈은 병원비로 지급한 뒤였다. 조금이라도 경계를 넘으면 빈곤한 게 아니었다. 국가가 숫자로 측정한 이만큼의 범주만이 빈곤 계층으로 간주됐다.

 

 아빠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환상을 종종 봤다.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몇 절차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수도꼭지 트는 방향을 헷갈려했다. 외출하면 길을 잃었다. 하고 싶은 경험을 하면서 아빠를 보살피는 삶을 꾸리기 쉽지 않았다.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해야 했다. 아빠가 앓는 병의 구체적 진단기록을 받으면 아빠를 시설에 입원시키는 게 가능했다. 몇 차례 검사에서 아빠는 중증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시설은 해당 진단을 이유로 아빠가 아직 건강하다고 판정했다. 입원은 쉽지 않았다.

 

 조기현 씨는 자기 삶을 서류로 증언해야 하는 상황을 지속해서 대면한다. 수치와 기록들이 그가 처한 상황을 대신 중계했다. 정책을 집행하는 이들이 내 “불쌍한” 서사를 발탁해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의료체계 역시 환자와 돌봄 당사자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았다. 몇 시간의 검진으로 진단명을 결정했다.

 

 그것들엔 일상이 배제돼 있었다. 가난한 이가 어떤 일상에 시달리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 환자와 돌봄 당사자의 일상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는지에 대한 염려도 없다. 어려운 이들의 삶을 보살피겠다는 태도 보다 시스템의 절차를 따르면 그만이라는 관료주의적 태도만 있다. 조기현 씨는 정책과 진단을 집행하는 주체에게 이들의 삶을 관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태도와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진주 씨는 엄마를 가족이라서 돌봤다고 했다. 엄마가 줬던 사랑을 기반으로 지금의 위치에 당도했다. 엄마가 진주 씨를 돌보는 일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진주 씨 역시 엄마를 돌봐야 함을 당위적으로 감각했다. 사정을 아는 친인척들은 진주 씨를 효자라고 불렀다.

 

 조기현 씨는 아빠를 죽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병원 앞에서 검진받기 싫다고 버티면 소리 지르고 멱살을 끌었다. 잠 못 들어 헛소리를 늘어놓는 아빠를 재우려 일부러 큰소리를 냈다. 조기현 씨의 처지를 아는 타인들 역시 그를 “효자”라고 불렀다.

 

 두 사람에게 부여된 효자라는 지위를 같은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조기현 씨는 효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효자가 아니라는 항변이 혀뿌리까지 찼다. 돌봄을 가족 내 의무로 규정하는 의식이 “효자”란 지위에 내포돼 있었다. 효자는 “나는 왜 아빠를 돌볼까”라는 자문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호명이었다. 돌봄은 가족이 치러야 할 책임이고 그것을 수행하지 않으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불효자” 딱지가 붙는다. 돌봄과 간병은 가족과 분리될 수 없는 수행이었다. 조기현 씨는 아빠를 가족이라서 돌본 게 아니었다. 효자는 더더욱 아니라고 선언했다. 아빠를 돌보는 일이 가족이라서 당연한 일로 해석되는 데에 이질감이 들었다.

 

 왜 아빠를 돌봤나. 모멸을 감수하고 하고 싶었던 일을 보류하고 버거운 일상이 지지부진 이어지는 상황에서 아빠를 돌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시민이어서 아빠를 돌봤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책임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민과 시민으로 관계 맺었기에 아빠를 돌봤다. 약자를 돌보는 일이 시민의 책무라서 아빠를 돌봤다. 한 사회의 성원을 돌보는 행위가 사회적 의미를 갖는 행위이며 “시민-되기의 한 속성이자 다른 시민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강력한 의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을 돌보며 시민의 의미를 배웠다.

 

 

가족은 이데올로기라서

 


 조기현 씨는 돌봄의 사회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돌봄은 약자를 살피는 사회적 활동임에도 가족이란 매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편이다. 돌봄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건, 가족이 떠맡은 돌봄을 국가와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맥락이다.

 

  그러나 “가족”은 이데올로기다. 가족이라서, 가족이니까, 라는 문장이 통용된다. 부당한 일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다. 가족 때문에 교사가 시험문제를 유출하고 가족 때문에 장관이 대학관계자와 유착하고 가족 때문에 국회의원이 자녀의 취업 알선을 위해 부정을 저지른다. 가족을 우선하는 가치관이 팽배하고 교육과 법과 제도에서도 가족주의는 위세를 떨친다. 동시에 돌봄을 가족의 의무로 간주하는 의식이 제도에 내포돼 있다. 가족=돌봄이라는 관계식을 전제하고 있다. 가족구성의 형태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의식도 여전하다.

 

 

 

 

 정부는 저소득 미혼모에게 월 12만 원의 양육비를 지원한다. 반면 미혼모가 직접 양육을 포기하고 다른 가정으로의 입양 수속을 밟는 경우 입양가정은 270만 원을 받는다. 매달 15만 원의 양육수당과 20만 원의 심리치료비, 의료지원 또한 해당 가정에 보장된다.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하는 것보다 직접 키울 때의 정부 지원이 더 적다. 제도는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하도록 종용한다. 돌봄을 가족 제도 내부에서 일어나게 유도하는 셈이며 특정한 유형의 가족에게서 치러지는 돌봄은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태도다.

 

 교육 정책 또한 가족이 떠맡는 걸 전제하고 설계됐다. 가족이 지급하는 공교육비 민간부담률은 OECD 국가 평균의 3배이고 전체 OECD 회원국 중 3번째로 많다. 고등학교부터의 교육비 부담은 전적으로 가족의 책임이다.

 

 2004년 제정된 건강가정기본법은 가족이데올로기의 온상이다. 법안은 가족 만들기를 의무로 삼는다. “표준”으로 간주되는 정상가족이 있음을 상정한다. 그 범주에서 벗어난 가족을 불완전하다고 암시하는 대목 또한 즐비하다. 제8조 제1항엔 “모두가 결혼·출산의 중요성을 알자”며 가족을 꾸림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진입한다고 명시한다. 제9조 제1항엔 “가족구성원은 가족 해체를 예방하고자 노력하라”며 개인이 가족단위 내부에 있음을 당연시한다. 해당 법안에 따라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건강가정 기본 계획을 5년마다 수립해야 하고 가정이 원활한 돌봄 기능을 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사회보장제도 역시 가족을 상정하고 운영된다. 정부의 돌봄 정책은 부양의무제로 대표되는 “선 부양 후 지원”의 양상이다. 일단 가족에게서 빈곤과 돌봄을 해소하고 그래도 안 되면 국가가 개입하겠다는 골자다.

 

 정부는 최소한의 주거, 생계, 교육, 의료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기초생활수급 제도를 꾸린다. 경제활동을 하는 자녀, 부모가 있으면 수급대상에서 제외되는데, 그들이 실제로 돌봄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여부가 고려되지는 않는다. 조기현 씨의 기초생활수급신청이 거부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제도는 아르바이트로 겨우 버티던 그의 근로능력을 2인분의 몫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동거하지 않고 못 본 지 오래인 동생 또한 의무 부양자로 간주해 소득을 합산했다.

 

 2015년 기준으로 부양의무제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을 받지 못한 저소득층은 93만 명으로 추정된다. 대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부양의무제 전면 폐지를 공약으로 걸었지만, 단계적 폐지만 추진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모든 주요후보가 부양의무제 폐지를 제기했던 것과 다르게 21대 총선에서 부양의무자 폐지를 공약으로 거론한 정당은 정의당과 민중당뿐이다. 시간이 지나 오히려 퇴보한 셈이다.

 

 사람들 의식에서, 제도에서 가족은 절대적 가치로 치부된다. 돌봄을 가족제도 이외의 다른 테두리에서 해결할 상상력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가. 가족은 무엇인가. 왜 이렇게 가족이 중요한가. 돌봄을 가족 내 의무로 규정하는 생각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가족과 돌봄> 

①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② "가족" 보다 "개인"이어야 한다

③ 돌봄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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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기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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