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4 (목)

대학알리

박성빈의 시선

어떤 게 '일반'적인 건데 ➀

"어떤 경로만이 ‘정상’이라고 취급되는 것도 이상합니다"

 

※ 삶에 특정한 관문이 있다고 간주됩니다. 졸업-연애-취업-결혼-출산을 거치는 경로의 삶만이 정상이라 치부됩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정상을 성취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입니다. 경쟁은 심화되고 쟁취할 수 있는 파이의 규모는 축소되는 때에, 아직도 특정한 경로를 이행하는 삶만이 ‘정상적 삶’이라 정의되는 건 이상합니다. 청년은 그 당연하고 고작인 ‘정상’을 성취하기 위해 혈안입니다. 이만큼 버둥거려 노력해야 겨우 ‘정상’이 될 수 있다고 언급됩니다.
 

 대학알리는 특정하고 좁은 ‘정상적 세대론’에서 배제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려 합니다. 혹은 그 정상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합니다. 어떤 특정한 유형만이 ‘청년’이고 ‘정상’일 수 없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규범 같은 건 없습니다. 때문에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내 서사 

 

 

 그게 당연하다. 상식이다. 일반적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서면에 명시된 규범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것이 당연하고 정상이다”란 의식이 생겼다. 이성애자 남녀 부모와 동생으로 구성된 가족이 있다. 초중고를 나와 대학에 진학했다. 전역하고 복학했다. ‘일반적’이라 간주되는 삶의 배경을 갖고 ‘일반적’인 삶의 절차를 밟는 중이라 여겼다.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봐왔다. 4인정도로 구성된 핵가족과 이성애자 부모가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학부를 졸업하면 취업하고 가정을 이룰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내 주변을 표본 삼아 타인 역시 마찬가지일거라 규정했다.
 

 이 때까지 내가 그려온 궤적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내가 누려온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보통이고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배경과 역사를 묻는 게 무례하다고 생각하여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않은 게 아니라 타인 역시 나 같은 ‘정상’의 규격을 당연히 갖췄을 거라 재단했다.

 

 어떤 것이 당연하고 일반적이라는 생각이 폭력임을 인지한 것은 내가 다문화가정에서 자랐음을 발언할 때다. 서로의 가정환경에 대한 대화가 개진되고 부모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엄마는 중국인이고 조선족이라서 길림성에서 왔다. 거기 외가가 있다. 은폐해야할 대단한 비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말하는 게 ‘보통’이나 ‘일반’의 기준에 미달된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그냥 말했다. 대화가 중단됐다. 탄식하고 싶은데 그게 무례한 언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말을 삼가는 듯 했다. 침묵하고 조심하고 내 눈치를 봤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에 매몰된 고통의 경험을 고백하는 시간이 됐다.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엄마가 중국에서 왔다고 말하자마자 눈자위가 빛났다. 그들 눈에 나는 일반적 삶의 기준에서 이탈한 셈이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고통과 빈곤 혹은 갈등이 즐비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으로 정의됐다. 정적이 따랐고 그 뒤에 이어진 대화가 각자의 고통에 대한 발언이어서 나는 도무지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멋대로 내 삶이 재단되는 기분. 연민의 대상으로 회자되는 게 이렇게 불쾌한 기분임을 감각했다.
 

문화적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집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주체. 아마 이게 그들이 순간적으로 정의한 ‘나’일거다. 실상 부모 사이가 좋은 건 결코 아니지만 그 이유가 다문화가정이어서라고 생각해 본적은 단 한번 도 없다. 정체성을 자문해 본 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시각으로 구성된 나는 그런 인간의 전형이었다.  

 

 얼마 지나서 나도 똑같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대학에 가지 않았다는 발언에 그 사람의 미래와 장래를 걱정하던 나. 미혼모 가정, 조손 가정이라는 말에 탄식을 삼키는 나. 어떤 배경과 절차를 멋대로 둔중한 고통이라 재단하여 위로랍시고 몇 마디 던지지만 실은 내가 그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경계 지었다.
 

 무엇이 당연하고 일반적이라는 의식은 그자체로 폭력적이다. 거기 포함되지 못하거나 자발적으로 이탈한 사람들의 삶을 멋대로 그 기준에 맞춰 재단해버려서다. 그건 단독자로써의 개인의 색깔과 존엄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폭력이다. 그리고 그 당연함을 누리는 사람들과 이미 그 조건을 쟁취할 수 없는 이들을 구별 짓는다. 장애인, 동성애자, 소수자의 삶, 그리고 ‘일반’적 삶의 루트를 살지 않은 이들은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이 기사를 쓴다. 나를 반성하기 위해 쓴다. 타인의 삶을 경청하고 그 삶을 서사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느낀 건 각자에게 각자의 맥락이 있다는 것. 그걸 보여주고 싶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일 수도 스스로 선택한 걸 수도 있다. 그걸 두고 보통, 정상의 기준으로 분류하는 건, 온당하지 않음을 넘어 삶에 대한 무례다.

 

 

 

 

 

 

권혜승의 서사

 

 

 지금이요? 지금은 괜찮아요. 앞으로 얼마만큼의 불행이 올지 모르겠지만 적당한 규모의 불행은 통과한 거 같아요. 내가 그린 궤적 전부를 말해 본 일이 별로 없네요. 헤아려봐야 하는데 그런 경험도 많지 않아서요.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고에 진학했어요. 취업을 위한 방편이 대학 진학인데 대학에 있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그 시간에 돈을 버는 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어요. 세상만사 돈과 연결되지 않은 게 없잖아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거나 미래를 위한 수단이 대학진학인데 나한텐 그 수단이 돈이었어요. 일단 돈이 있어야 무엇을 하고 싶은지 혹은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미성년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맥도날드나 뷔페 정도였습니다. 처음엔 여행비용을 마련하고 싶어서였는데 3년을 꼬박 했네요. 어디에도 의존하고 싶지 않았어요. 노동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자립에 대한 의식을 키워 준다는 겁니다. 내가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는다는 감각. 그 감각이 좋았습니다. 고작 십대의 나이인데 그렇게 일하면 서글프지 않았냐고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게 당연한 때 아니냐고요? 아니요. 그건 어린 것과 무관합니다. 왜 어리면 철들지 않은 인간으로 취급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일이 없습니다.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이 큰 편은 아닙니다. 의식하지 않고 살았더니. 운 좋게 학급 임원을 매년 했어요. 컴퓨터나 세무 관련 자격증도 많이 취득했고요. 
 

 당시에 미투운동이 일어났는데 우리학교 학생들도 문제의식을 발화했어요. 그 때 나는 동참하지 않았어요. 나와 상관없다고 느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도 무지했어요. 희롱이고 성차별인데 그런 말과 행동을 목격해도 쉬이 넘겨버렸습니다. 

 

 

여성으로서 노동하는 것

 

 

 고3때 취업을 했죠. 처음 취업한 곳은 통신기계 단말기를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부품 취급, 반품 관리 등의 사무 업무가 계약내용이었는데 계속 생산 업무로 이동시키려는 겁니다. 나는 학교에서 회계를 주로 공부했는데 배운 내용을 적용해야 하는 곳도 아니고 별 미련이 없어서 한 달 일하고 그만뒀어요. 퇴사하겠다고 말했을 때 차장이란 작자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습니다. 그만두지 말라고 설득하는 건 좋은데 남자가 없어서 그렇다, 남자를 소개시켜주겠다나 뭐라나. 여자를 남자의 관심이나 사랑이 있어야 생존 가능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건지. 기분 나빴습니다. 더 더욱 있을 이유가 없어졌어요.

 

 다음에 은행에 취업했습니다. 타인을 지속적으로 상대하는 직업이 나와 맞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 당시 담임선생이 실적 때문에 제 의사를 묻지 않고 멋대로 지원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은행에 취업한 건 보수나 시간이 안정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부모님도 거기 들어가길 원하셨고요. 

 

 셈해보면 거기서 1년 6개월 정도 일했어요. 3개월 정도 수습기간이 있다고 명시했는데 실상 2-3주 가량 업무의 전반을 훑게 하고 실제 업무에 투입됐습니다. 입사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힘들어 보였습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근데 뭐 어떻게 꾸역꾸역 버티긴 했네요. 동력 같은 게 있었냐니... 글쎄요. 그런 게 있었나. 거창한 동력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냥 했습니다.

 

 주 업무는 창구 보는 거였어요. 9시까지 출근해서 6시까지 일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유니폼 입고 창구를 열기 전 준비에 꽤 많은 품이 들어서 실상 8시까지 가야했어요. 야근이나 잔업의 순간이 적었던 건 좋았습니다. 

 

 별의별 일을 겪었습니다. 반말은 기본 탑재고 누가 더 무례한지 경쟁하는 것처럼 막말하던 인간들. 최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사람을 상대하는 나날. 내가 어리고 만만해보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무례하게 취급한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한번은 중년 남성 고객을 응대하는데 은행 업무시 필수인 신분증 같은 서류를 구비하지 않은 겁니다. 도움 드릴 수 없다고 말하자마자 그 작자는 고함 치고 반말하고 욕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너 같은 게. 그런 문장들이 귀에 걸리고 나는 밖에 나가 종일 울었습니다. 결국 지점장과 통화하더군요. 알고 보니 그는 국회의원 보좌관이었습니다. 지점장 정도의 ‘급’인 사람이 겨우 상대할 수 있는 위치니까 ‘감히’라는 표현을 썼는지도 모르겠네요. 그에게 은행창구 직원인 나는 ‘감히’ 어울릴 수 없고 ‘감히’ 도움 주기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안되는 위치였던 거죠.

 

 똑같았습니다. 매뉴얼이 생겼다거나 별도의 개선책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회사는 그런 일을 겪고도 자사 직원을 보호할 수단을 강구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높은’ 고객들의 불편을 초래하지 않을지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도, 회사도 다 환멸 났어요.

 

 문이 열리는 게 싫었습니다. 번호표가 놓인 선반을 부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싫었습니다. ‘인간 혐오’란 표현이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사람이 싫어지게 됐습니다. 정신이 삐걱거린다는 표현. 그게 정확합니다. 그래서 사표를 썼습니다. 후회, 미련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얼른 거기서 나와야 했습니다.

 

 

앞으로의 나날들

 

 

 퇴직금이랑 모아둔 돈으로 6개월 정도 여행을 다녔습니다. 놀고 싶기도 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이버대학에 다닙니다. 회계와 심리공부를 하고 싶어서요. 세대론들이 범람하는데 사실 나는 그 담론들이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에 유념해 본 적 없고, 적어도 나는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지금의 삶에 이르렀으니까. 어떤 경로만이 ‘정상’이라고 취급되는 것도 이상합니다. 시대착오적입니다. 나 같은 사람은 취업과 대학의 순번이 바뀌어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돌연변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나는 그냥 이걸 선택했을 뿐입니다. 
 

고민은 여전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과거보다 행복합니다. 어디서 봤는데 사람들이 가지는 걱정이나 고민의 70%는 쓸데없는 거라고 해요. 이젠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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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기자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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