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대학알리

한국외국어대학교

"아멘" 저는 퀴어이자 개신교도입니다

"그럼 저는 천국 가기 싫어요, 차라리 지옥 갈래요"
"퀴어와 개신교는 내 존재와 같아요"
퀴어와 개신교라는 괴리...나에겐 순리

제24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지난 7월 1일 을지로 2가 일대에서 개최됐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 떨어진 세종대로에서는 퀴어축제에 반대하는 종교·보수 단체들이 대규모로 모였다.

 

퀴어들의 축제에 반대세력은 빠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퀴어축제지만 그들은 스스로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자처한다. 특히 보수 개신교는 '동성애 = 죄악'을 외치며 퀴어 및 퀴어를 지지하는 일부 진보 개신교에 극구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25개 단체가 모인 '무지개예수'는 서울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는 등 성소수자 개신교도 및 성소수자와 연대한다. 외대알리는 무지개예수 소속의 섬돌향린교회 백순재 교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Q. 어릴 적부터 개신교 신자였나요?

 

제 모태신앙은 천주교예요. 엄마가 저를 임신하고 나서 성당을 다니기 시작하셨거든요. 천주교 집안까지는 아니었지만, 배경을 갖고 있었죠. 저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성당을 다녔어요. 그런데 성당에 발길을 끊게 된 일이 있어요.

 

뚜렷한 에피소드는 없지만, 제가 9살쯤 '게이'로서 정체화를 시작했거든요. 동시에 본능적으로 '나는 성당에 있으면 안 되는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첫 영성체를 모시고 난 후에 발길을 끊었어요.

 

입대 전후로는 불교 내지 한국 무속 신앙에 심취했어요. 국악을 좋아했거든요. 무당이나 악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전통예술 공연단체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전도됐어요. 알고보니 개신교 신자들이 중심에 있는, 조금은 특별한 팀이었거든요.

 

이후 섬돌향린교회를 만나기까지는 10여 년이 더 걸렸어요. 가톨릭 신자로 태어나 열 살부턴 무교(無敎), 스물 들어 무교(巫敎). 20대 중반에 개신교를 만나 30대 중반인 지금 섬돌향린교회에 정착했죠. 이게 제 신앙 발자취예요.

 

Q. 어떤 계기로 한국 무속 신앙에 매력을 느끼셨나요?

 

한국 전통 공연 중에 가장 멋있고 고난도인 음악과 춤은 다 무속에서 나왔거든요. 가장 높게 쳐주기도 하고 학교 다닐 때 경험과도 관련이 있어요.

 

서울예대 극작과에 다녔는데 우연한 계기로 기생, 무당 할머니들에게 반했어요. 그들 모습에서 소수자로서, 나와 닮은 그들의 삶에 공명하게 됐던 게 컸죠. 이를 계기로 한국 전통 공연 예술에 매혹됐어요.

 

 

Q. 20대 시절 전통예술 공연단체에서 전도되셨다고요?

 

이 단체는 생활 양식 자체를 과거에 유랑했던 광대패처럼 만들어가자는 모토를 갖고 있어요. 6살짜리 꼬마부터 60살 할머니까지 2~30명 정도가 합숙을 하는 엄청 옛날 방식의 도제식 공동체였죠. 그렇게 밀접하게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전도가 되었던 것 같아요.

 

특히 전통예술계에서 사제 관계는 부모와 자식 관계만큼 의미를 갖잖아요. 그러다 보니 커밍아웃을 먼저 했고, 이후 개신교 관점에서 사부님과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속 깊은 얘기도 나누면서 저절로 마음의 문이 열렸던 것 같아요.

 

재밌는 건, 이 교단은 보수 개신교에서도 오랫동안 이단 시비가 있었던 굉장히 특이한 소수 교단이었죠. 제가 있던 공연단체는 개신교보다 불교 및 무속과 밀접한 전통 예술을 하는 팀이라는 이유로 그 안에서조차 소수자성을 띠었어요. 그리고 저는 '퀴어' 당사자로서 또 한 겹 더 소수자인, 쉽지 않은 위치에 있던 것 같아요.

 

Q. 깊이 몸 담았던 공연단체에서의 에피소드가 있나요?

 

신앙을 처음 고백한 날이에요. 사부님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제가 딱 두 가지 질문을 했어요. 하나는 "그동안 제가 해 온 건 다 사랑이 아니고 죄였나요? 기쁘고, 슬프고, 애틋했던 그 마음들은 그저 사탄에게 놀아난 것뿐인가요?"였어요.

 

다른 하나는 "자살한 제 퀴어 친구들, 개신교도가 아닌 채로 삶을 마감한 가족들은 다 지옥에 가 있는 건가요? 전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니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나요? 그럼 저는 천국 가기 싫어요. 그냥 지옥으로 갈래요"였죠. 이 얘기를 하면서 20분 가까이 울었던 것 같아요.

 

사부님은 절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다가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딱 한 마디 해 주시더라고요. 모호하고 막연한 답변이었죠. 하지만 그 대답을 듣고 이 길을 가보자고 결심하게 됐어요. 제게 종교는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에요. 인간의 마음과 머리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채워주는 게 종교라고 생각해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 믿어보자 싶었죠.

 

9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정체화했고 아웃팅을 당하기도 하면서, 지방 소도시 온 동네에 소문이 퍼진 채 청소년기를 보냈어요. 가족으로부터 처절하게 버림받기도 했고요. 제 존재에 대해 회의뿐이었지만 사부님과의 대화 속에서 위로와 사랑을 느꼈고, 내가 어쩌면 교회 안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Q. 교회 내에서 동성애에 대한 박해를 받으신 경험이 있나요?

 

섬돌향린교회를 만나기 전, 모교회(母敎會)에서 겪은 일이에요. 그 교회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거리가 멀었고, 코로나 전에도 이미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돼 있어서, 믿게 된 지 7년 만에야 처음으로 대면 예배에 갔어요. 두려우면서도 벅차고 설레는 맘으로 난생처음 예배당 안에 들어가 본거예요.

 

근데 하필 그날 저를 환영이라도 하듯, 목사가 설교를 하며 동성애에 대한 온갖 혐오 발언을 늘어놓았어요. 욕만 안 했지 내용이나 표정이 적나라했죠. 천 명이 들어간다는 으리으리한 홀에서 울리는 그 소리를 라이브로 듣고 있자니 한숨이 푹 나오더군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아직 때가 아닌가 보다'하고 그냥 기다렸어요. '왜 이렇게 번거롭게 태어났고 수고롭게 살게 되는지 등에 대해 다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요.

 

 

Q. 성경이 동성애를 적대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인간이, 세상이 그렇게 납작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게 있어 개신교 신앙은 이게 핵심이에요. '어떤 신이 있는데,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다. 살아가는 데에 있어 힘들 수 있어도 서로 다투고 괴롭히게 내버려 두실 때가 있어도, 그 또한 귀하게 쓰기 위해 강하게 키우시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아직까지는 이렇게만 믿고 있으려해요.

 

 

Q. 정체성과 종교적 신념의 갈등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믿어도 된다' 이거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도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게 주시는 생각과 마음들, 너를 인도하는 곳,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고요.

 

 

Q. 다수 개신교가 퀴어를 반대하는 이유는 뭘까요?

 

당사자로서 깊이 고민했던 내용이에요. '저 사람들은 나를 왜 이렇게 미워하지?'하면서 내가 진짜 잘못한 게 있나 필사적으로 찾게 되거든요. 그래서 되게 고통스러운 질문이기도 해요.

 

종교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되려 더 몰두하고 눈멀기 쉬운 것 같아요. 여호와의 예수와 성령의 존재를 해석하고 믿는 방식이 모두 다르잖아요. 같은 교회 안에서 조차도요. 그런 점에서 개신교는 늘 어딘가를 향해 폭력을 가장 잔인하게 퍼부어온 종교 중 하나였고, 그런 면이 취약점이자 이유라고 생각해요.

 

Q. 본인의 인생에서 퀴어와 개신교란 무엇인가요?

 

'나'다. (살을 꼬집으며) 이게 개신교고 퀴어에요.

 

Q. 마지막 한 마디는요?

 

아멘.


 

 

백 교우는 "퀴어와 개신교는 나 자체이자 내 존재"라며 "신은 날 사랑한다"고 말했다. 교회 안팎에서 퀴어라는 이유로 아픔을 겪은 그였지만, 그가 환영받을 곳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는 20대 시절 공연단체에서 만난 개신교도들과 함께 땀 흘리며 꿈을 키웠지만, 개신교 신자가 된 후 처음으로 나간 교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갖은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교회에서 교우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었다.

 

퀴어와 개신교는 누군가에겐 괴리지만 그에겐 순리다.

 

 

기하늘 기자(sky41100@naver.com)

박원주 기자(dnjswn0320@gmail.com)

 

*해당 기사는 외대알리 지면 38호: '청년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상은'에 실린 기사로, 2023년 7월에 작성되었습니다.

*취재원의 '자살'이라는 표현은 데스킹 과정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수정되어 지면 기사와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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