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자유다”라는 선언은 개인의 선택과 주체적 삶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현대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명제처럼 들린다. 한 사람의 지향성이나 정체성이 얼마나 ‘정상성’에 부합하는가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겐 사랑을 자유롭게 영위할 권리가 있음이 이전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뤄지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을 터다. 연애 예능의 범람이 주지했던 ‘전형화된 이성애’는 <메리퀴어>나 <남의 연애>의 방영이 퀴어 커플을 조명하며 그 한계를 벗었다. 특히 <메리퀴어>는 △남성 동성애자 커플 △여성 동성애자 커플 △FTM(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 트랜스젠더와 여성 바이섹슈얼 커플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회적 제한을 그대로 보여주며 ‘곁’에 있는 성소수자의 연애를 환기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한편, 최근 2023 MBC 연예대상에서 여자 신인상을 받은 MTF 트렌스젠더 풍자의 방송계에서 역할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는 기왕의 한국 예능이 MTF 트렌스젠더를 다룰 때 ‘여성성’을 대상화하거나 조롱하던 타자에서 벗어나 스스로 말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수상이 성소수자의 첫 지상파 시상식 수상으로 기록됨은 정상성의 외부자로 다뤄졌던 이들이 더 이상 사적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게 된 변화를 시사한다. 생물학적 조건으로 명명된 ‘인간’이 관계망 속에서 주체성을 발휘하고 권리를 행사할 ‘사람’으로서 인정받으려면 사회적으로 명명되고 가시화돼야 한다는 점에서 해당 변화는 개인의 성취에만 머무르지 않고 더 보편적인 차원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역시 자신의 칼럼에서 2023년 방송계를 형성한 것이 ‘나답게’임을 밝히면서도 성소수자에겐 자기 현상(現像)이 어려운 현실을 지적했다. “‘나답게’라는 말은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주류의 감성에 거슬리지 않아야 하는 성소수자에게 기만적”이라는 입장이다. 곧 공적 차원에서 ‘자리가 마련’되는 일이 사적 영역에서 ‘자기를 보존’하는 일과 긴밀히 연결됨은 당사자로 하여금 ‘사람’으로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이지만, 체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문장이 서두에 언급한 “사랑은 자유다”라는 선언이다. 정말 이 사회에서 사랑은 ‘자유’로 온전할 수 있는가, 그 자유는 누구에 의해 보장되며 누구로부터 수행되는가. 이런 맥락 가운데, 사랑은 자유라는 말의 맹점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표현이 함의한 인간의 자율성은 개인이 선택한 삶의 모양이나 방식이 어떤 혐오나 공격에 노출된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오직 당사자의 몫이라는 폭력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해 연애하거나, 생물학적 성이 아닌 다른 성별로 자기를 정체화하고 살아가겠다는 용기를 낸 이들을 배제하고 부정할 만한 근거로 정당화된다. “너희가 사랑할 자유가 있듯, 나는 너희를 거부할 자유가 있다”는 혐오의 주요한 논리는 바로 이 ‘자율성’에 근거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자유’라는 말에서 자유는 삶에서 실현 불가하도록 무마되곤 하기에 얄팍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지난해 홍준표 대구 시장이 대구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며 발언했던 “성다수자의 권익”이나,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서울문화광장 사용 불허의 주요 근거로 작동했던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권리’에 관한 논의 역시 자유가 실현될 수 없는 사회적 조건을 증명한다. 특히 해당 사례에서 성소수자가 현상할 ‘장소’를 박탈한 것은 한나 아렌트의 논의에 따르면 근본적인 인권 침해이기도 하다. 우리로 하여금 권리를 행사할 ‘인간’으로 규명하는 것은 생물학적 조건이 아니라 일상적 시공간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받는 대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곧 자신의 견해를 의미 있게 전달할 장소가 상실된-수행력(레베카 쿠클라)을 행사할 수 없도록 배치함은 “너의 존재가 ‘사람’임을 증명하라”는 위계의 반영이기도 하다.
해당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자신을 비가시화하거나, 주류의 심기를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만 사회 안에 거주하기(하이데거, 인간의 실존 방식)를 허락받는다.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면서도 지상파 방송 출현이나, 광장에서 권리 투쟁은 불편하게 다루는 시선과 목소리는 여기에 결부돼 있다. 그러니 그들이 ‘사랑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혼인 등의 권리를 주장하며 광장에 등장할 때, 자유에 관한 엄중한 선언은 철회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소수자에게 허락된 자유란 조건적 환대와 유사한 궤도를 그린다. 정상성이 요구하는 타자의 모습에 순응하는 자만이 그 대단한 ‘사랑의 자유’를 누릴만한 권한을 가진 존재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자유라는 말은 치졸한 거짓말이다. 이는 자유를 누릴만한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 선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허락된 권리만을 누리도록 종용하고, 이 정도로 만족할 순 없는지 묻는 조건적 환대의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현경 작가는 자신의 책인 ‘사람, 장소, 환대’에서 고립된 개인들은 타자의 인정과 지지 없이 존엄을 유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개인의 사적 공간을 지키는 일은 개인의 ‘자리(장소)’에 대한 공적인 인정으로 이뤄짐을 명시했다. 다시 말해, ‘사랑은 자유’라는 선언이 당사자의 거주함-실존을 현현할 힘으로 작동하려면, 사회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문장은 “사랑은 침해할 수 없는 권리”라는 이해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