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3 (토)

대학알리

건국대학교

[칼리움;k-alli-um] 무한재회

장면 하나. 동거인과 함께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간 날이었다. 도통 요리를 하지 않는 동거인이 무려 김치찌개를 끓여주겠다고 넌지시 말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함께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러다 두부를 깜빡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에야 깨달았다. 동거인은 자기는 먼저 들어갈 터이니 나에게 돌아가는 길에 있는 할인마트에 들러 두부를 사 오라 말했다. 한데 내 두 손은 계란 30구와 이백 미리 우유 등 각종 식재료로 충분히 버거웠기에 일순 화가 일었다. 같이 가면 될 것 아닌가, 자신만 편히 일찍 들어가겠다는 고약한 마음씨에 기분이 퍽 상했다. 잠깐 대거리를 했으나 2인 가구 가장의 말을 당해낼 재간이 있을 쏘랴.

 

이쯤에서 말하건대 내가 월세를 나누는 사람은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친언니다. 별 수 있나. 아랫것인 나는 씩씩대며 마트에 들어갔고 나의 가모장은 자신 몫의 짐을 챙겨 들고 먼저 집에 다다른다. 나는 두부를 사고 늦게 돌아와 냉장고에 챙겨 넣으며 되뇐다.

 

“으휴, 저놈의 성질머리……”

 

지방을 떠나 수도권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두 사람은 주거 불안정에 시달리며 살림을 합쳤다. 동거의 매일은 녹록지 않다. 장성한 청년들이 그다지 널찍하지 않은 주거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경우 더욱 그렇다. 우리 자매는 많은 부분에서 부딪치며 산다. 나는 청각이 예민하여 큰 소리를 기피하지만 언니는 갖은 낭랑한 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이부자리와 옷가지, 책상, 설거지 등의 살림살이 정리를 바로바로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이나 언니는 가사노동의 융통성을 제대로 발휘하는 인간이다. 부모의 자장 아래서 우연찮게 만난 두 사람은 너무나도 유다른 사람인지라 비좁은 자취방엔 은근한 신경전이 횡행하다.

 

가장에게 큰 소리를 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 오르는 날이 허다하나 정반대의 날들도 충분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나를 위해 꼭 남겨주는 가장이라서. 아니면 혼자래야 감당 불가한 자취하는 일상을 떠받치는 벅참이 태산 같아서.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른다. 여하간 둘은 서로에게 필요하다. 담합하여 헤쳐 나갈 일들이 산적해 있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희롱을 당해 귀갓길이 무서운 밤엔 언니에게 도움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다.

 

“언니 데리러 와줘!”

 

바투 답장이 온다.

 

“오키 바로 달려감.”

 

이뿐인가. 이웃 어르신의 상반신탈의난동쇼에 겁먹다가도 하나는 증거를 위해 동영상 촬영을 하고 하나는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단수나 정전이 되어도, 커튼이 망가져도, 둘이서 어깨를 겯고 어물쩍 해낸다. 뉴스를 챙기다 두 사람의 안전과 내일을 점검하며 배수구를 청소하고 책상을 조립한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자끼리 살면 별수 없이 강해진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여유 따위 너끈히 허락되지 않는다.

 

피로함에 비척대며 귀가해 먼저 잠에 들어 수축하고 이완하는 동거인의 둥그런 배를 보며 나도 따라 마음이 가만해진 적이 있다. 따끈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숙면을 취하는 모습이 나에게 은근하고 나른한 위안을 주었다. 쌓여있는 그릇들을 보고 이내 분노를 눌러야 했지만 말이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노여움과 기쁨 사이의 울퉁불퉁한 감정을 쉬지 않고 오르내리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잠버릇과 소음과 가치관을 이해해보다가도 미끄러져 나의 옹색함을 확인하고 미워하다 화해하는 일을 감내해야 유지할 수 있는 생활이다.

 

그 둥그런 배를 가진 괄괄하고 다감한 성질머리의 그이와 유리(遊離)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나는 통학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학교와 더 가까운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고 언니는 현재 거주지에 더 머무르기로 했다. 내달부터 월세를 나누지 않는다. 이렇게 두 사람의 우당탕탕 동거생활은 마침표를 찍는다. 고백하자면 먹먹해지는 동시에 고대하고 있다.

 

자매가 영영 헤어지는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모든 인간이 유별하기에 자매들도 매한가지로 고유하다. 나의 경우 이름이 비슷한 그 여자를 떠올리면 새삼 설명할 필요 없이 불가항력이 된다. 신형철 문학 평론가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른 적 있다. 살을 부대끼며 운명공동체의 달콤쌉싸름함을 사사한 그에게 바치고픈 문장이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26쪽

 

자매는 피차의 ‘싹수없음’과 ‘경우 없음’과 ‘철없음’ 등 무수한 결여를 끈덕지게 발견하고 견디며(못 견디며) 미숙한 성년에 발을 디디고 있다. 하루는 제 나이가 되었다 금시에 일곱 살, 열 살 어린이들이 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나는 그와 깍듯하게 타자가 되기를 내처 시도해오고 있지만 실패해왔고, 실패할 것이다. 오늘도 밤이 지난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오늘부터 우리의 별거가 시작된다. 우리가 함께일 시간은 하염없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와 나 사이의 균형감을 유지한 채 오래 걷고 싶다. 자매는 서로를 잃지 않고(잃지 못하고) 한참 배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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