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4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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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동물권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아득한 간격을 말하다

팟캐스트 오디오 다큐멘터리 [말하는 몸: 내가 쓰는 헝거] 제작자

오마이뉴스 유지영 기자

 

1. 나는 내 몸에 갇혀있다

2020년 10월 14일, 서울시NPO지원센터 비영리스타트업 5차 온택트 네트워킹 포럼 취재가 있었다. 당시 포럼의 주제는 페미니즘으로 대학, 연대, 교육, 기술, 미디어 등 여러 분야에서 여성주의 담론을 반영하고자 하는 단체의 발표가 있었다. 중요한 문제의식과 의제가 오갔다. 평소처럼 기사를 완성했는데 이상하게도 일을 떠나 계속해서 곱씹고 싶은 대목이 있었다. 취재 후 기사를 출판한 다음에도 유튜브 영상의 딱 한 구간만을 10번 넘게 반복해서 들을 만큼 생생했던 한 문장이 있었다. [말하는 몸_내가 쓰는 헝거]의 발표를 맡은 유지영 기자의 말이었다.

 

“내 몸을 사랑하자(Body-positive)는 말이 아니라

일단 내 몸에 대해 말이라도 꺼내 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이 한마디의 말이 18살부터 지금까지의 내 샤워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대개 화장실 거울을 앞에 두고 정면을 바라보며 샤워를 한다. 하지만 나는 18살 때부터 측면으로 돌아 샤워를 해왔다. 화장실 거울은 상반신에서 하반신으로 조금 내려가는 부분까지 비춘다. 그래서 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급격하게 사이즈가 불어난 내 몸은 불편했다. 몸이 무겁다거나 관절이 아프다거나 튼 살이 생기는 건 익숙했다.

 

그보다도 더 힘들었던 건 피부질환이었다. 허벅지는 수시로 가려웠고 딱지가 생기면 뜯고 덧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사타구니에서 이어지는 허벅지가 검게 착색된 모습을 스쳐 가듯이 봤다. 끔찍했다. 약간의 실루엣과 색을 봤을 뿐인데 고개를 내려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 후로는 샴푸 통이나 바디워시 통으로 거울의 하단을 가리거나 아예 등을 돌려 샤워했다. 그리고 이 기사를 쓰는 지금도 측면 샤워를 고집하며 내 하반신을 내게 보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몸’이다. 많은 이들은 대개 비만인의 나태함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조언할 것이다. 두 가지의 시선과 조언을 시시때때로 받아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든 진짜 내 몸을 말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양쪽의 조언은 패배자 혹은 멋진 사람이라는, 결국에는 크게 다를 바 없는 허울이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지만 내 ‘몸’은 어쩐지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전히 치욕스러운 실패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몸, 착색된 내 피부를 사랑할 수 없다. 사이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혹여 내게 시선이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주제에 애써 관심 없는 척하며 화제를 돌린다. 비만인의 몸은 욕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양 굴어왔다. 내 사이즈를 보며 손가락질하거나 솔직하게 감상을 말하는 아이들을 무서워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 수많은 감정을 무의식 속에 가지고 가면서도 애써 내가 내 몸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확실하게 실패라고 믿으면서 실패가 아니라고 외쳤다.

 

 

2.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은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내 자신도 언어화해본 적 없는 이 감각이 유지영 기자의 한 문장을 계기로 튀어나왔다. “맞아, 나 내 몸이 싫어. 끔찍하게 미워. 사랑해주고 싶지만 정작 나부터가 내 몸을 쳐다보지 못할 만큼” 문득 [말하는 몸-내가 쓰는 헝거] 팟캐스트 방송의 시작이었다던 록산 게이의 『헝거』가 떠올랐다.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실 의심이 컸다. 또 비만인 자신을 어떻게든 사랑하라는 말이려나. 첫 부분을 읽자마자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나도 간절히 쓰고 싶다. 다이어트 성공 후기와 함께 내 안의 악마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물리쳤는지 마음껏 자랑하는 책을. 아니면 내 몸의 크기가 어떠하건 간에 내 몸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담담히 고백하는 책을. 하지만 나는 그런 책을 쓰지 못하고 대신 이런 책을 쓰게 되었다.“

록산게이 『헝거』, pp. 2-3

 

“내 몸으로 산다는 것의 현실은 이렇다. 나는 감옥에 갇혀 있다. 이 감옥이 가장 좌절스러운 점은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인다는 점이다. 감옥 밖으로 손을 뻗을 수는 있지만 많이 뻗지는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괜찮게 여기고 잘 지내는 척하면 매우 쉬울 것이다. 내 몸을 내가 미안해하고 설명을 해야 하는 무언가로 보지 않는다면 좋을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고 여성을 비현실적인 이상에 구겨 넣으려 하는 천편일률적인 미의 기준이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다양한 체형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의 미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세세한 부분까지 바꾸려들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가치는 내 옷의 사이즈나 외모에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믿고 싶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악의적인 문화,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통제하려 하는 문화 안에서 여성으로 성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내 몸이나 내 몸이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비합리적인 기준에 저항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 이 두 가지는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

록산게이 『헝거』 pp.89-91

 

구체적인 존재를 제대로 본 적 없이 던지는 위로와는 달랐다. 앎과 감각의 괴리를 안다. 그 괴리 속에서 몸에 갇힌 채로 받는 상처가 무엇인지 안다. ‘몸’을 둘러싼 복합적인 감각을 안다. 『헝거』의 많은 대목과 유지영 기자의 언어는 그래서 강렬했다.

 

최근 여러 영역에서 ‘바디 파지티브’ 메시지가 자주 보인다. 비교적 나아진 방향이자 긍정적인 변화다. 그러나 앞서 내가 나열해놓은 모순만 보더라도 정작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할 기회는 없다. 다양성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몸에 대한 말하기는 왜 시작되어야 하는지, 왜 ‘말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면 ‘바디 파지티브’는 공허할 뿐이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게 기능하기에.

 

비만인이 겪는 자기혐오, 사회적 기준에 포섭되고 싶다는 내밀한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 그저 그들이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냐는 삐딱한 생각도 들었다. 『헝거』의 서술을 빌리자면, “뚱뚱함 받아들이기 운동”은 사실 이미 누군가는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고 자신의 사이즈에 만족하는 척 살아가야만 하거나 무조건적인 자기 인정의 지점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뼈아픈 사실을 방증할 뿐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몸을 사랑하자’라는 명제 이전에 ‘몸을 말해보고 싶었다’는 말이 고마웠다. 섣부르게 긍정하기보다 몸을 스스로 말하고 구성하는 단계를 말했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내 몸 사랑하기’를 흔한 맥락에서 답습하기보다는 몸에 어떤 기억과 서사들이 새겨져 있는지 먼저 되돌아보는 구체적인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말하는 몸-내가 쓰는 헝거]의 기획자인 유지영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몸’을 말한다는 것에 관한 생각을 들어봤다.

 

3. 말하는 몸 :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아득한 경계

- [말하는 몸]은 어떤 방송인가?

자기 몸에 대해 말하기를 선택한 88명 이상의 여성과 함께 만든 오디오 다큐멘터리다. 평균 15분 정도 진행되고 오로지 출연자의 목소리로만 진행된다. 박선영 PD가 편집을 맡고 있고 나는 출연자와 1-2시간 인터뷰를 진행한다. 다만 예외적으로 출연자 혼자 녹음실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 말을 15분에서 20분 말하고 나온 출연자도 있다. 2018년 겨울, 인권운동가 이용수 선생님의 인터뷰를 첫 화로 시작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마지막으로 총 88회의 에피소드를 끝냈다.

 

- [말하는 몸]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헝거를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첫 장에 백세희 작가님 부분에서 나오는데, 나는 일을 시작한 지 1년 안 돼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에서 허우적거리다 인터뷰로 만난 분이 백세희 작가다. 백세희 작가의 저작인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읽고 너무 좋았다. 그 기회에 만났는데 그때 『헝거』를 선물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책이 정말 좋았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독립언론에서였다. 2015년에 내가 썼던 기사가 학과 내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알게 되었지만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이 내 몸이었다. 살이 찐 몸을 입 밖으로 말하기조차 두려운 상태로 페미니즘을 계속 공부하면서 내부 모순이 있었다. 록산게이의 『헝거』에 “내가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게 기능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록산 게이와 같은 유명한 작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신에 나와 다른 건 말했다는 거다. 그렇게 말함과 말하지 않은 아득한 경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헝거』를 읽고 좋은 책이라 처음으로 낭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렸고 박선영 PD가 연락을 줘서 오디오북 제작을 결정했다.

 

 

- 몸에 대한 경험을 다룬 여러 책 중에서 왜 [헝거]였나?

너무 잘 써서 아닐까? (웃음) 어렵다. 헝거에서 제일 좋았던 챕터가, 벌목꾼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다. 굉장히 행복한 연애를 하다가 중간에 록산 게이가 먼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잘 안되고 그 남자가 자기를 따라와주길 원하지만 서로 그 얘기를 못하고 결국 헤어지는 장면이 있다. 헤어지는 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에게서 결국 웅장한 제스쳐는 나오지 않았다. 내 몸 때문일 거야”라고 말한다. 친구든 연인이든 관계를 맺을 때, 관계에서의 지속적인 관계 맺음이 성공 혹은 실패하는 경우가 몸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근데 관계에서의 성패조차 몸으로 해석한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몸에 사로잡혀있나를 보여준 것 같다. 록산은 자신의 몸을 “우리(CAGE)”라고 한다. 이 몸 안에 이 사람이 얼마나 갇혀있는지 보여준다. 내가 관계 맺음에 대해 관심이 많기도 하고 나도 이 몸 때문에 관계가 잘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경험이 있어서 더 그랬다. 옷가게에서 옷을 고르는 장면, 관계 맺음 속에서의 몸에 대해 결국 상처받는 모습에서 내 모습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에 『헝거』가 더 특별했다.

 

- 『헝거』를 읽어 보니 낭독하고 싶고 오디오북을 만들고 싶었다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너무 강력한 책이다. [말하는 몸] 책 서문에도 썼듯이 정말 좋은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사소할지라도 결국에는 내 이야기와 연결된다. 말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나도 내 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말하는 몸]의 많은 에피소드가 흥미로웠지만 그중에서도 인터뷰이의 복합적인 감정이 드러났던 편이 특히 인상적이다.

『헝거』의 핵심 중의 하나가 양가감정이다. 내가 내 몸에 대해서 어제는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가 이대로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감정을 잘 담고 싶었다.

 

- 방송을 통해서 듣고 싶었던 바가 있었는가?

결국에 우리는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88명의 경험이 다르다. 너무 달라서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묶기조차 힘들고 페미니즘을 보는 시각도 아마 다를 거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성이라는 단어 아래 묶일 수 있고 내가 이들의 말을 존중하고 열심히 듣는다면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도 다다를 것 같다는 생각으로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팟캐스트를 듣는 사람들이 “나도 내 얘기를 해볼 수 있을까?”, “나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들과 다르지만 결국에는 같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4. 자기계발적 몸 담론이 아닌 ‘몸 말하기’로

- 최근 들어 ‘파지티브’가 자주 보인다. 그중에서도 바디 파지티브(Body-positive)가 페미니즘과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데, 페미니즘을 배우면서 느꼈던 내부 모순에 대해서 듣고 싶다.

몸에 대한 담론이 페미니즘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나를 사랑하자,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해서 가혹한 사회에 대한 목소리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전히 말하기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자기계발 담론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몸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것이다. 몸은 내 책임이라는 신화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거다. 아픈 몸이랑도 연결된다. 아픈 몸은 내가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생겼다는 인식이 보통이다. 우울증이 대표적이다. 나가서 햇볕을 쐰다거나 운동을 하라든지 하는 자기계발 신화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자기계발 담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뚱뚱한 몸을 말한다는 것은 실패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실패한 사람이 되기 싫고 나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을 거다. 그리고 실제로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말을 꺼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고 봤다. 아직도 네이버 댓글이나 SNS를 보면 몸의 정상성에 대해서 여전히 갈망하는 흐름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몸의 정상성이라는 게 조금씩 넓어지고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협소한 게 현실인 것 같다.

 

여성으로서 마른 몸을 선망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근육을 길러서 단단한 근육이 있는 몸을 선망하기도 한다. 근데 그 선망하는 범위가 조금 넓어진 것일 뿐이지 여전히 다양성에 대한 수용성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내가 열심히 운동해서 근육을 만든다, 누군가는 그게 마른 몸을 선망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하겠지만 여전히 몸의 정상성이라는 기준을 세워놓고 그걸 향해 간다는 점에서 아쉽게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확하게 이 몸이 정답이다’ 혹은 ‘마른 몸을 벗어나서 단단한 몸으로 가야한다’고 하지만 또 하나의 정상성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경우에는, 우울증이 조금씩 낫기 시작하면서 살이 급격하게 찌기 시작했다. 3년 전, 20킬로가 쪘다. 찔 때는 잘 모르고 있다가 찌고 나서야 실감했다. 우울증이 낫기 시작할 때는 마음이 좀 안정된 상태, 몸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상태였다. 몸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뭔가를 먹었고 20킬로가 찌고 나서 이 몸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다.

 

『헝거』를 읽고 나서도 내가 내 몸을 인정해야지 이런 순간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 몸이 아니라 ‘이거’를 어떻게 해야 하지? 뭔가를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서 지금도 100% 자유롭냐고 하면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신나리 출연자의 에피소드가 기억이 난다. 몸에 대한 인식은 직선이 아니다. 끊임없이 너울을 만들면서 몸에 대한 강박을 조금 덜고 내일은 좀 더하더라도 그래도 괜찮고 이런 너울을 견디는 거다. 말하는 몸을 하고 나서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냐고 하면 정말 자유로워졌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조금 나아졌을 뿐이지 절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조금 나아졌다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은 희망을 품고 싶은 마음이 있다.

 

‘문학 3’이라는 웹 매거진에 ‘그래서 달라졌습니까’라는 기고문을 연재한 적이 있다. 말하는 몸 진행 중에 있었던 일이다. 회사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왔는데 유리문에 비친 내 실루엣을 보고 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내가 방송을 만든 지가 꽤 되었는데 아직도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바디 파지티브(Body-positive)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한계를 느꼈는가?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도 있을 수 있지만, 어느 정도는 쌍방향 소통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바디 파지티브(Body-positive)’는 공허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 내 몸을 사랑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불순한 의도도 섞여 있다고 본다. 결국에는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해야지’, ‘네가 노력해야지’라는 말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개인화하는 거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 몸의 정상성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편협한 기준을 갖고 있다. 가슴이 크고 허리가 잘록하며 골반이 나와 있고 엉덩이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하고 가는 팔다리. 심지어는 소음순 수술도 권하는 사회다. 그 사회에서 내가 내 몸을 사랑하면 된다는 말이 내가 노력해서 일구면 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노력을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일까?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될 일인지 싶다.

 

-서울시NPO지원센터 발표에서 “‘바디 파지티브’ 이전에 ‘내 몸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기획하게 되었다.

이 부분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한다. 말하지조차 못하는 것, 극심한 고통이나 너무 심한 콤플렉스를 사람들은 대체로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말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치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나한테는 여러 가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은데, 몸이 바로 그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말하는 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일단 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어떤 형태의 몸이든, 이 사회가 말하는 정상성의 몸 말고 다른 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선 답변에서 바디 파지티브가 개인화되어 있다고 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몸에 대해서 각자의 다른 몸을 말한다면 사회적인 발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가 있는 거다. 개인적으로는 내 몸에 대해 감정적 골이 깊어서 꺼내지 못했던 걸 꺼내 보는 거, 정말 창피하지만 말해보고 견뎌보는 거다. 근데 그게 여러 명이 되면 그 자체로 사회적인 의미가 형성된다. 그리고 말하는 몸의 출연자 중에 나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 확신한다. 분명히 처음 몸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내가 록산 게이의 책을 읽었을 때 “이건 분명히 나의 이야기이기도 해” 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 더 많은 ‘몸 말하기’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공동의 증언이 갖는 효과를 말하고 싶었다. 가령 위안부 당사자의 공통된 증언, 혹은 조금씩 다른 증언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위안부 운동의 맥락에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말하는 몸을 보면 가볍게 말한 분들도 있고 무겁게 말한 분들도 있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는 증언이다. 증언이 같고도 다를 때 사회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결국에는 몸의 개인화를 막아준다. 내가 노력해서 만드는 몸이라는 신화에 맞서게 해준다.

 

 

몸 이야기를 할 때 고립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말하는 몸]이 없었으면 나도 내 몸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을 거다. 그래서 책에 "출연자들의 용기에 경유해서 나도 내 몸을 말해보려 한다"고 썼다.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독자들이 읽고 자기 몸에 대해 ‘나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사랑하든 아니든 일단 말해보는 거다. 말하는 것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5. 몸을 말하고 몸에 대해 쓰다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이 글의 서두에 담긴 치욕적 실패의 이야기를 수십 번 다시 읽지만 여전히 다 드러내도 될까 두렵다. 극적인 변화는 생기지 않는다. 사회적 기준에 포섭되고자 하는 욕망을 모른 척하지 못한다. 그러나 ‘몸 말하기’의 결론이 끝없는 비관과 내 몸을 향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증오는 아니다. 다만, 한 출연자의 말처럼 ‘내 몸을 받아들이자’가 아니라 매일 지는 싸움이 되더라도 ‘어제보다 조금 덜 미워하자’로 나아가려 한다. 그렇기에 말한다. 내 몸에는 많은 감각과 경험들이 존재하고 엉켜있다고.

 

그리고 또 하나의 목표가 있다. 이 글이 “ 나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의 용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쓴다. 『헝거』에는 록산 게이가 옷가게에서 만난 소녀가 등장한다.

 

“들어간 매장에 있는 어떤 옷도 입지 못할 정도로 너무 큰 몸을 하고, 그저 어떻게든, 아무거나 나에게 맞기만 하는 옷을 찾아 헤매면서 그 와중에 생각해주는 척하는 사람들의 뾰족하고 무신경한 평가와 잔소리까지 꾹 참고 들어야 하는 그런 소녀. 옷 가게에서 그런 소녀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소녀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잘 안아주는 사람이 아니지만 당장이라도 그 소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소녀를 이 나쁜 세상으로부터, 뚱뚱한 사람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이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싶었다. 사실 나도 이 세상이 어떤지 알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내가 그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건 없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타인의 잔인한 눈초리와 지적질에서, 너무나 좁은 의자에서, 아니 이 너무나 큰 몸에는 너무나 작은 모든 것에서 도망쳐버릴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나 안전지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탈의실까지 따라 들어가서 그 소녀에게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실제로 정말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얼굴 위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록산게이 『헝거』 p.52

 

록산 게이가 그러했듯이 여성의 몸에 지독하게 잔인한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말하는 것조차 두렵게 만든 이 세상에서, 몸을 둘러싼 앎과 감각의 충돌에 무관심했던 이 세상에서, “몸 말하기”를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하나의 용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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