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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했던 당신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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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비싸야 한다 ➀

 

 경향신문이 지난해 11월 21일 발간한 신문 1면엔 이름이 나열돼 있다. 1200개 넘는 이름이 지면에 인쇄됐다.  
 

 이름은 2018년 1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사망한 노동자들의 목록이다. 이름 옆엔 떨어짐, 끼임, 깔림 등의 문장이 괄호 쳐져 있다. 옆의 괄호는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명시한 기록이다. 유00씨는 철근을 하역하는 작업 도중 추락하며 죽었다. 백00씨는 엘리베이터 수리 도중 2층과 3층 사이 승강로에 끼여 죽었다. 하00씨는 계근대 보수 작업 중 계근대 하부 피트 내부의 페인트 증기가 폭발하여 죽었다. 김00씨는 쿠팡 배송 물건을 나르던 중 허혈성 심장질환으로 죽었다. 하루 평균 2.5명이 산업 재해로 목숨을 잃는다. 
 

 이름은 나에게 부여된 특별한 호명이다. 내가 타인들과 구별된 개별적 존재임을 확인 할 수 있는 수단이 이름이다.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이란 존재를 세상에 공표한다.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인식한다. 이름이 불러지는 순간이 누적되며 당신은 성장한다. 이름이 당신의 고유함을 증언한다. 경향신문은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소환했다. 그들이 고유한 인간임을 다시 환기했다. 
 

 그동안 산업 재해를 수치와 통계로 접했다. OECD 국가 중 산업 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1위라는 뉴스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노동자가 죽었다는 단신 보도가 스쳐지나간다. 산업 재해 통계가 갱신됐다며 각성이 필요하다는 구호가 해마다 울린다. 탄식하지만, 그 때뿐이다. 나는 상상력이 부족하여 수치 너머의 상황을 헤아리지 못했다. 죽어서 ㄱ씨, A씨로 거론되는 이들이 점점 증가하지만, 그들은 내 세계와 무관한 낯선 이방인이었다.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짐작하지 못했다. 안타깝다는 금방 휘발될 탄식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ㄱ씨와 A씨와 자음과 알파벳으로 명칭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발생한 불운에 휘말렸다고 지레 어림잡았을 뿐이다.
 

 어쩌면 내가 노동자의 죽음을 개인의 불운으로 치부했던 건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내이자 아빠이자 엄마로 호명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려왔던 삶의 궤적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ㄱ씨와 A씨라는 호칭너머 당신이 고유한 인간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모씨와 백모씨와 하모씨와 ㄱ씨와 A씨로 거론됐던 수많은 이름들이 쌓여 숫자를 만들었다. 매해 더 많은 이름들이 죽고 우리는 혀를 차고 비통에 잠기는 시늉을 잠깐 하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숫자는 우리에게 어떤 감각도 새기지 못한다. 숫자 너머에 이름과 삶이 있음을 금방 간과한다. 
 

 통계청의 2018년 사회동향 자료를 보면 한국의 산재 사고 발생률은 OECD국가의 평균 수치보다 낮지만 산재로 인한 사망률은 가장 높다. OECD국가 중 산재 사망률은 23년 동안 21회 1위에 올랐다. 2005년부터는 3위권 아래로 내려간 일이 없다.(송영훈기자, <한국은 최악의 산재국가?> 뉴스톱, 19.12.29) 
 

 그들의 죽음은 구조적 인과다. 어쩌다 발생한 불운의 숫자가 저만큼 많을 리 없다. 사고 발생률은 낮은데 사망률이 높은 현상은 사망에 이를 만큼의 사고가 아니면 산업재해 신고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맥락으로 해석가능하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갈 법한 환경에 노출된 채 작업하는 이들이 태반이라는 맥락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다쳐도 현장은 가동된다. 심지어 죽어도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노동여건을 개선하지 않는 기업
방기하는 정부
환경을 개선하라는 정당하고 당연한 요구는 묵살되고
바뀐 건 없다

 

 

 

 

 

 

 은유 작가가 쓴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산업 재해로 사망한 청년들의 죽음을 다룬다. 기업은 장례식장에 찾아와 산재 성립이 어렵다며 합의를 종용하거나 회사의 안전 관리 소홀을 노동자 개인의 실수로 만들기 위해 사실관계를 왜곡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작업 환경을 개선하라는 정당하고 당연한 요구는 묵살된다. 그 현장을 그대로 보존한 채 작업을 지속한다. 모든 것들을 숫자로 계량하는 기업의 논리 아래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권리는 박탈당한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 등장하는 김민호 씨는 17년 7월부터 생수 공장에 현장실습생으로 참여했다. 전임자가 일주일동안 민호 씨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퇴사해 민호 씨 혼자 기계를 작동했다. 실습생의 신분이었지만 하는 일은 정규직과 같았다. 
 

 공정 한 군데에 문제가 생길 경우 전체 공장 가동을 멈추는 게 일반적이다. 민호 씨가 일하던 현장은 공정 하나가 멈춰도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갔다. 민호 씨는 이를 해결하려다 팰리타이저와 컨베이어벨트 사이에 목과 가슴이 끼며 사망했다. 
 

 전임자가 공정에 문제가 있다고 상부에 보고한 게 수차례다. 그럼에도 시정되지 않았다. 민호씨 역시 사고 발생이 우려된다고 토로했다. 회사는 민호 씨 개인의 실수로 산재 서류를 작성하다 발각됐다. 공장 정문엔 안전우수업체 인증마크가 붙어 있었는데, 5년 동안 안전점검이 이뤄지지 않았다. 민호씨가 죽고도 여전히 가동되는 중이다. 
 

 민호 씨는 가정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특성화고에 진학했다. 졸업하면 곧바로 취업이 가능하고 정규직으로 이동하면 대학 진학이 가능해서다. 민호 씨에겐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들을 실천하고 싶었다. 야간작업을 병행해 10시 반에 퇴근하며 돈을 모았다. 계획들은 이뤄지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 유가족들을 인터뷰하며 민호 씨의 삶을 조합한다. 더 이상 성취될 수 없는 계획들을 조망한다. 통계로 산출되는 죽음 하나하나에 삶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정한 노동자만이 목소리 낼 수 있다
특정한 노동자만이 자기 권리를 획득 할 수 있다
노동은 위계화 됐다

 


 대통령은 노동절 메시지에서 “노동자가 이 사회의 주류”라며 “산재는 성실한 노동의 과정에서 발생합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노동의 종류에 위계가 매겨지는 사회인 걸 모두 안다. 건설 현장에서 수행되는 일용직 노동자의 노동과 대기업 정규직 사원의 노동에 같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경쟁을 거쳐 온당하게 획득한 정규 노동만이 사회적 인정과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들이 죽은 건 안타깝지만, 내가 노력하면 그런 종류의 산업재해가 발생하는 노동환경에서 일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대통령의 메시지엔 노동이 위계화된 현실에 대한 맥락이 없다. 그 같은 현실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맥락도 없다. 
 

 특정한 노동자만이 이 사회의 주류로서 목소리 낼 수 있다. 산업재해는 성실한 노동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부조리를 방치하고 모든 노동을 주류로 취급하지 않는 현실에서 발생한다. 노동은 이제 계층의 문제다.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씨와 태안화력 발전소에서 운송설비를 점검하던 김용균씨와 생수 공장에서 공정을 가동하던 김민호씨가 그 같은 현실에서 죽었다. 매일 청년과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가 죽는데 거기엔 탄식만 고여 있다. 바뀐 게 없다. 탄식을 실천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서 노동이 신성하다는 말에 거부감이 든다. 노동함으로써 한 사회의 성원으로 진입한다고 말한다. 노동함으로써 자기 세상을 넓힐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니다. 황정은 작가가 썼던 것처럼 “일단 노동은 비싸야” 한다. 비싸지 않은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는 자기 온당한 권리를 말할 수 없다. 죽음을 파헤치려 시도하는 노동자의 유가족들은 “사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 것”이라는 여론에 부딪힌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엔 비싸지 않은 노동을 수행하는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하청 소속 노동자 등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기구가 없다. 저명한 기업가의 죽음은 경제 부흥의 주역이라며 기리지만, 비싸지 않은 노동을 수행하다 죽은 노동자는 ㄱ씨로 잠깐 소환된다. 적어도 이곳에서 노동이 노동다운 취급을 받으려면 비싸야 한다.
 

 유가족들에게 "노동자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정치는 무엇인가. 정치는 어떻게 작동돼야 하는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정치가 개인의 삶과 결부되지 못한다면 그건 정치가 아니다. 하루 2.5명이 죽는 노동구조를 방기하는 정치는 그럼 정치인가. 개인의 삶을 팽개치는 정치는 그럼 정치인가. 죽어서 현장에 매몰된 이름들을 복기하지 않는 정치는 그럼 정치인가. 힘 있는 자들의 호소만을 대변하는 정치는 그럼 정치인가.

 

 알지 못했던 당신이 죽었다. 이제 알아야 한다. 그 이름들을 되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