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연의 크레딧] 닫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곧은 노랫소리

  • 등록 2026.04.03 14: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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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파올라 코르텔레시 감독·주연

 

영화는 언제나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초대한다. 두어 시간 남짓, 우리는 우리가 살아 본 적 없는 삶을 경험한다. 스크린 앞에 앉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영 모르고 지나쳤을 누군가의 삶을.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어떻게 그들을 기억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쓴다. 이 글은 영화가 내게 남긴 것들을 기록하는 크레딧이다.

 

* 본 리뷰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선택을 한다.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나의 의지가 향하는 대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간다. 그러나 이토록 단순해 보이는 '선택'이 누군가에겐 불가능하던 시대가 있었다. 불과 한 세기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2023)>는 우리를 1946년 이탈리아의 한 반지하로 데려다 놓는다. 전쟁이 끝나고 첫 여성 참정권이 주어진 해이자, 여전히 여성을 향한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다.
 

일상이 되어버린 폭력

 

영화는 첫 장면부터 당시 시대상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주인공 델리아(파올라 코르텔레시)가 남편 이바노(발레리오 마스탄드레아)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지만, 돌아오는 것은 폭력이다. 느닷없이 남편으로부터 뺨을 맞았지만, 델리아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이바노의 폭력은 이미 일상이 되었다. 집안일을 못 한다는, 말이 너무 많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델리아는 맞는다. 아무도 나서서 이를 말리지 못한다. 남편에게 맞는 일이 흔했던 당시 여성의 삶이다.

 

다만 영화는 폭력을 노골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의 몸짓은 얼핏 춤처럼 보인다. 관객이 거부감이나 트라우마 없이 폭력의 실체에 가닿도록 설계한, 감독 파올라 코르텔레시의 섬세한 연출이다.

 

델리아는 한 번도 이바노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묵묵히 집안일하고, 식사를 차리고, 아파 누운 시아버지를 돌보고,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하루를 버틴다. 그마저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보다 한참 적은 일급을 받는다.

 

델리아가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을 때는 친구 마리사(에마누엘라 파넬리)를 만날 때뿐이다. 어느 날 델리아의 옛사랑 니노(비니치오 마르치오니)는 이 동네를 떠날 것이라며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민다. 그러던 어느 날 델리아는 편지 한 장을 받고, 아무도 모르게 방 안 깊숙한 곳에 편지를 숨겨둔다.

 

쉽게 끊을 수 없는 폭력의 굴레

 

델리아의 딸 마르셀라(로마나 마조라 베르기노)는 맞기만 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며 날 선 말을 내뱉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남자친구 줄리오(프란체스코 센토라메)의 프로포즈를 기다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마르셀라가 집안이 좋은 줄리오와 결혼하면 델리아와 달리 행복하게 살 것이라 믿는다. 두 사람의 약혼이 이루어지며 기대는 더 커진다. 그러나 그 앞에 마냥 아름다운 미래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델리아는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냐며 마르셀라의 립스틱을 문질러 지우는 줄리오의 모습에서 과거의 이바노를 떠올린다. 결혼 전 그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은 곧 통제와 감시가 됐고, 폭력이 됐다. 가난에서 벗어난다고 폭력의 굴레를 끊을 수 있는 건게 아니었다.

 

델리아는 마르셀라도 결국 자신과 같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둘의 결혼을 무산시킨다. 마르셀라의 웨딩드레스를 사주려 몰래 모아둔 비상금은 마르셀라를 학교에 보낼 학비가 된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델리아는 숨겨두었던 편지를 다시 펼친다. 그리고 어딘가로 가기로 결심한다. 옥상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델리아의 결연한 표정과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니노의 모습이 교차한다. 그날은 다가오고, 갑자기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델리아는 발목을 붙잡힌다.

 

안타까움을 전하는 마리사에게 델리아는 담담히 답한다. "그래도 아직 내일이 있다"고. 다음 날 아침, 델리아는 이바노에게 일을 나간다고 거짓말하고는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짙은 화장을 하고서 어딘가로 다급히 달려간다.

 

델리아가 도착한 곳은 옛사랑 니노가 있는 곳도, 머나먼 낯선 도시도 아니다. 여성들의 첫 투표가 이틀간 이루어지는 투표소였다. 델리아가 받았던 편지도 사실은 투표 서류였다.

 

연애편지가 아닌 투표권을 선택한 여자들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이 여기 있다. 델리아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다른 남성을 따라 도망치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여성이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또 다른 남성이 아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한편, 잠에서 깬 마르셀라는 델리아가 머리맡에 두고 간 돈과 서투른 맞춤법으로 “이 돈으로 학교 다녀”라고 적힌 편지를 본다. 그리고 델리아가 문 앞에 흘리고 간 투표 서류를 챙겨 투표소로 향한다.

 

델리아는 투표 서류를 두고 왔음을 깨닫고 크게 당황하지만, 마르셀라에게서 투표 서류를 건네받아 투표할 수 있게 된다. 투표 봉투에 침을 발라 붙이기 위해 여성들은 스스로 립스틱을 지운다. 타인의 강제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투표를 마치고 나온 델리아는 인파 속 서 있는 마르셀라와 눈이 마주친다. 그때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 다니엘레 실베스트리의 노래 ‘A bocca chiusa(입을 다물고)’의 가사는 영화의 장면과 어우러지며 메시지를 아름답게 전달한다.

 

E senza scudi per proteggermi né armi per difendermi
(나를 지켜줄 방패도 없고, 나를 방어할 무기도 없고)

 

Né caschi per nascondermi o santi a cui rivolgermi
(숨을 헬멧도 없고, 기도할 성인도 없고)

 

Con solo questa lingua in bocca
(입안에는 이 혀 하나뿐인데)

 

E se mi tagli pure questa
(이것마저 잘라버린다 해도)

 

Io non mi fermo, scusa
(나는 멈추지 않아, 미안하지만)

 

Canto pure a bocca chiusa
(입을 다문 채로도 노래해)

 

“나는 입을 다문 채로도 노래할 수 있다”는 노랫말은 오랫동안 남성에 의해 입을 틀어막혀온 수많은 여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이다음 이어지는 허밍에 맞춰 립싱크하는 델리아의 모습과 환하게 웃는 마르셀라의 얼굴은 관객에게 잔잔하고 깊은 감동을 전한다.

 

네오리얼리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배우 겸 가수로 활동해 온 파올라 코르텔레시가 연출한 첫 장편 영화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델리아라는 인물을 만나기를 기다려 왔다는 듯 연기와 연출을 통해 그녀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는 2023년 이탈리아에서 개봉하여 그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역대 박스오피스 10위에 오르며 큰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국내에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먼저 소개됐으며, 지난 3월 4일 정식 개봉했다.

 

흑백 화면을 선택한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전후 이탈리아의 현실을 날 것 그대로 담아냈던 네오리얼리즘(Italian neorealism)의 질감을 빌려오되, 그 사조가 조명하지 않았던 여성의 시선을 정면에 놓는다. 가부장제 아래서 착취당하던 당대 여성의 고통을 한 사람의 삶을 빌려 생생히 스크린에 옮긴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의 상징은 빵과 장미다. 빵은 여성의 생존권을, 장미는 참정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는 그 두 가지를 한 편의 영화 안에 녹여냈다. 수많은 델리아의 삶을 지나 우리는 이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삶과 꿈,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닫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곧은 노랫소리는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3월이 끝난 지금, 영화를 통해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보면 어떨까. 한 사람의 치열한 삶이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게 해줄 테니.

 

[작품 정보]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2023, 118분)
감독: 파올라 코르텔레시 / 출연: 파올라 코르텔레시, 발레리오 마스탄드레아, 로마나 마조라 베르가노 등 / 제작: Wildside / 수입·배급: 콘텐츠판다

 


박서연 대학알리 기자 (syeone319@gmail.com)

박서연 syeone3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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