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 글쓰기는 자기미화라서

2020.10.24 16:02:24

 

 

엄마의 노동
 

 

엄마는 인생의 절반을 중국에서 살았다. 아빠와 결혼하며 한국에 정착했다. 한국은 엄마를 조선족으로 분류했다. 3년 주기로 “전국 다문화 가정 실태조사”에 응답하기를 종용했다. “배우자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십니까?” “생활을 전반적으로 고려할 때 귀하께서는 현재의 삶에 얼마나 만족합니까” 그런 문항에 답하며 엄마는 대상화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파악했다. 이곳이 자기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 예감했다. 
 

아빠와 결혼하며 20년 넘게 살던 곳을 떠난 엄마는 아빠가 믿을만한 가장이 아니란 걸 확인한 뒤부터 돈을 벌었다. 중국어 학원 강사로 시작한 노동은 기업 연수원 강사로 이어졌다가 학습지 강사로 변모했다. 근로 계약서를 쓰는 노동에서 학습지 수강 인원에 따라 급여 액수를 책정하는 노동이 됐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노동은 중심에서 도처로, 도처에서 변방으로 밀려났다. 
 

엄마는 짜증을 부렸다. 나는 엄마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아빠 같은 인간이 되지 말라는 문장을 구태여 아빠 앞에서 말하는 맥락을 나는 별로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울었다. 엄마의 엄마가 죽었다. 엄마는 중국으로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지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지 못했다. 연수원에서 HSK 강의를 하고 학습지를 채점하느라 고향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의 빈소를 조문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어떻게 아팠는지, 얼마나 아팠는지 따위를 동생들에게 전화로 들을 때마다 당신 마음에 얼마나 많은 도랑이 생겼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엄마는 처연하게 울었다. 나는 “처연하다”의 뜻을 그 때 배웠다. 우는 엄마를 안아줬다. 안아주면서 절대 엄마 같은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엄마의 인생은 내 인생과 무관했다. 엄마의 처연함은 엄마의 몫이고 그것이 내게 전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엄마가 누군가의 곁이 가장 필요할 때 엄마에게 선을 그었다. 
 

생활하기 위해서 일해야 했다. 밥을 먹고 집에서 자고 옷을 입기 위해선 일해야 했다. 좀처럼 노동할 곳을 구하지 못했던 엄마는 결혼이주여성을 대상으로 개최된 취업 박람회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상용 취업자를 구하는 곳은 없었다. 100만원 미만의 비숙련노동과 일용직 근로자를 구하는 곳이 태반이었다. 산모도우미, 조리, 양육 등 돌봄노동자를 수요로 하는 곳들이었다. 결혼이주여성의 역할을 며느리, 양육자 정도로 간주하는 의식의 산물이었다.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다문화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구호가 맴돌 때마다 위선 같았다. 다문화 사회라는 구호엔 출생률에 기여하고 한국자녀를 돌봐줄 결혼이주여성의 돌봄 노동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내포돼 있었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성원이 아니었다. 엄마는 한국 사회의 성원이 아니었다.
 

엄마는 종종 해가 지는 모습을 봤다. 사위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빛나던 것들의 윤곽이 흐려졌다. 엄마는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자기인생의 퇴락 같다고 느꼈다.
 

엄마가 부렸던 짜증은 자기 삶이 고단하다는 증언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노동이 고단하다는 외침이었다.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나와 무관한 인생이라며 경계지었다. 내 엄마임에도. 나는 내가 싫었다.

 

 

아빠의 노동

 

 

아빠는 동서울 시장 신발가게에서 일했다. 할아버지의 가게였다. 누군가를 응대하기엔 친절한 성격이 아니어서 일하는 시간은 짧았다. 일하는 시간이 아니면 집에 있었다. 종일 TV를 봤다. 역정과 짜증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나날에도 TV를 봤다. 경멸이 할퀼 때도 TV를 봤다. 할머니는 욕을 했다. 엄마는 무시했다. 할아버지는 책임 운운하는 설교를 지속했다. 그 자식인 내가 듣거나 말거나. 아빠는 TV를 통해 삶을 체념하는 법을 배웠다. 자기 시야에 지금 들어오는 건 역정과 경멸뿐인데 TV에선 그것과 무관한 상황이 펼쳐지고 그것과 무관한 인간들이 나와 웃고 떠들고 슬퍼했다. 아빠는 그런 삶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고 슬퍼할 수 있는 삶. 일상의 구차함이 없는 삶. 책임이 없는 삶.

 

아빠는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불쑥 집에서 나가 일하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일이 없을 땐 여전히 TV를 봤다. 한 달 신으면 밑창이 닳는 가짜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파는 것만으론 공과금도 지불할 수 없었다. 그가 어떤 맥락으로 TV를 보는 삶에서 노동하는 삶으로 국면을 전환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는 절박함이 비로소 생겨났던 건지. “책임”이란 단어를 실감하려는 시도였는지. 나는 그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그 즈음부터 아빠 지갑을 뒤졌다. 

 

 

나는 싸구려 락스 냄새가 나는 학교 화장실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족은 싫었고 친구는 없었다. 친구가 없다는 걸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화장실에서 빵을 먹었다. 그 때 나는 청승에 찌들어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데 대체 누가 날 좋아해줘서 친구를 하겠냐는 심정이었다. 내 모습은 구질구질했다. 가짜 말고 진짜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신었다면. 소풍 갈 때 입는 사복에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 이름이 명시돼 있었다면. 그런 것들을 갖춰야 사귈 수 있는 게 친구라고 믿었다. 고립된 것 같은 감각에 나는 아빠 지갑을 뒤졌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뒤졌다. 아빠가 어떻게 노동하는지 알 바 아니었다. 손에 돈이 쥐여 있으면 위안이 됐다. 그 위안의 성분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갑에서 만원씩 꺼낼 때마다 당신이 책임을 졌다면 내가 당신의 지갑을 뒤질 일도 없을 거라고 되뇌었다.

 

등록금은 비쌌다. 학교가 멀어 자취하는 비용도 유념해야 했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나날이 이어졌다. 방세부터 생활비까지 고등학생 때와는 돈이 들어가는 규모가 달랐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은 돈은 식비 수준이었다. 집에 전화를 해서 돈 좀 부쳐달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 끼니를 굶었지만 이내 거리낌이 없어졌다. 돈 쓰는 게 즐거웠다. 대학을 다녀본 적 없던 당신들은 으레 대학이라서 지불해야하는 돈의 범위가 그 정도는 된다고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구태여 별 말 없었던 것일 수 있다. 집에서 부쳐준 돈으로 옷을 사 입고 신발을 신었고 술을 마셨다. 주변에선 다들 그렇게 살았다. 즐거워 보였다. 나도 즐거워지고 싶었다. 그 대열에 합류했다는 기분을 누리고 싶어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돈을 썼다. 즐거움의 비용은 당신이 다리가 부러지고 팀장에게 욕을 들어가면서 얻은 임금으로 치렀다. 그게 때때로 환기돼 네가 인간이냐고 자맥질하다가 그럼 가난한 인간은 가난에 걸맞게 삶을 꾸려야 하는 거냐고 변명했다. 자문을 반복하다가 내일 집을 나서면 또 다시 돈을 썼다. 

 

아빠를 경멸했다. 그러나 내 삶은 경멸의 대상이 수행한 노동을 양분 삼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싫었다.

 

 

박성빈의 노동

 

 

제값 매겨지지 못한 노동이 서럽다는 것을 군대에서 확인했다. 내색하면 징징거리지 말라는 식이었다. 누구나 겪는 과정이란 게 제값을 지불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걸 통과하니 도저히 당신들에게 돈 좀 부쳐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내 손으로 지불해야 했다. 무조건 노동해야 했다. 

 

제값 받는 노동을 하고 싶었다.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일했다. 그곳은 아르바이트 사원과도 1년 단위의 계약서를 쓰고 법에 명시된 모든 수당을 제공했다. 일주일에 6일을 일했다. 패티를 뒤집고 카운터를 보고 식자재를 상하차하고 폐기름을 갈고 청소를 했다. 6일 내내 그 짓을 반복하고 집에 오면 짜증을 부리거나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빠와 엄마가 무슨 심정이었는지 이해했다. 

 

처음 보는 액수가 통장에 찍혔다. 눈이 돌아갔다. 하고 싶은걸 하면서 돈을 모으기엔 적은 금액이었다. 적게 쓰고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이 떠올랐다. 구질구질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구질구질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를 포장하고 싶었다. 

 

너와 싸웠다. 꼭 그렇게 힘든 내색을 해야 겠냐고 물었다. 내가 말을 했던가. 행동에서 드러났던가. 내가 정말 그랬는지 돌아보다가 화가 났다. 공무원 부모 밑에서 자란 니가 뭘 알겠냐는 일갈이 목구멍까지 찼다. 

 

삼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싸움을 회피했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다. 때때로 너를 보는 게 버거웠다. 

 

언젠가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너 역시 돈이 없어 버둥거리는 때였다. 너는 누군가 자신을 동정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게 죽도록 싫다고 말했다. 동정 받는 건 자기가 구질구질하게 보인다는 맥락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울었다. 네가 울었던 건 그때 내가 동정해서였다. 연인에게까지 동정 받아서였다. 네가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곁이었다. 나는 곁을 내주면 됐는데 그걸 못했다. 너를 동정하면서 내 괜찮은 안위를 확인했는지도 모르겠다.

 

힘든 내색을 해야겠냐는 말. 네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너를 좀 봐달라는 말이었다. 너에게 성의를 보이란 말이었다. 뒤틀린 마음을 꺼내란 말이었다. 네가 내 곁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자존심을 부렸다. 나는 네가 힘들 때 동정했는데, 네가 나같은 마음일까봐 무서웠다. 

 

너는 너의 구질구질한 마음이 뭔지 보여줬다. 나는 숨겼다. 같이 구질구질해지면 적어도 서로에겐 구차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그 기회를 자존심 때문에 날렸다. 나를 포장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날렸다.

 

웃는 사람들이 싫었다. 내 삶은 왜 이 모양이냐고. 왜 이런 궤적만 그리는 거냐고. 뭐가 그렇게 즐겁냐고 당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목이 졸릴 때에도 웃는지 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이것이 위악인지, 진심인지, 뒤틀린 자기연민의 발로인지 헷갈렸다. 그러다가 자기연민의 일종임을 알았다. 자기연민이 시야를 좁게 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의 팔이 잘려도 내 손끝 베인 게 제일 아팠다. 너와 헤어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 나는 내가 싫었다.
  


글쓰기는 자기미화라서

 

 

모든 글쓰기는 자기미화다. 글 쓰는 주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학적 글도 마찬가지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워서다.

 

솔직하게 쓰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비겁한지 썼다. 도무지 나를 좋아할 수 없는 순간이 있어서 ‘내가 싫다’고 썼다. 그런데 여전히 나를 포장하고 싶어서 ‘내가 싫다’고 말한 건 아닐까. 자신을 싫어할 만큼의 윤리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쓴 건 아닐까. 내가 뒤틀렸다고, 내가 싫다고 쓰는 것이야 말로 자신을 미화하는 단계 중 최종 심급인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글쓰기는 다짐이다. L이 그랬다. “내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나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자기연민을 털고 다짐 같은 글쓰기를 하면 된다. 이런 내가 되겠다는 결심을 담아 쓰면 된다. 그럼 글은 공언이고 약속이다. 그렇게 글을 쓰면 나 역시 글속의 나를 닮기 위해 더 노력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그동안 자학으로서 자기 연민에 매몰된 건지도 모르겠다. 다짐 같은 글쓰기를 하겠다고 여기 다짐한다. 변명하고 싶지 않다. 자학하고 싶지 않다. 나는 바뀌고 싶다. 나를 사랑하고 싶다. 

 

 

일러스트 : 안은

박성빈 기자 qkzmsi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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