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1996년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에서 활동한 박종진 前 유뉴스 대표, 現 필맥 페이스북 그룹 운영자의 수기록을 아카이브 목적으로 종합한 기사입니다.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전대기련)은 1970년대 ‘전국대학언론인협회’와 1980년대 ‘자유언론실천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자대기련)’을 거쳐 1987년 전국 조직으로 공식 출범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활동 전성기를 맞았다. 1992년 '중앙상황실 통신'이 제작돼 각 대학·지역·사회운동 소식과 공동기사·공동 설문 결과가 공유됐다. 이후 하이텔 'UNIP 동우회'로 온라인 교류가 이어졌고, 이 경험은 2000년 대학 전문 뉴스사이트 'Unews(유뉴스)' 탄생의 계기가 됐다. 1996년 발간된 '필맥(筆脈)' 46호는 전대기련 10년의 10대 소식을 정리해 당시 고민과 사업의 전모를 전한다. 전대기련은 2000대 초부터 쇠퇴하다가 2010년대 초 마지막 '기자한마당'을 끝으로 소멸했다.

① 1970~71년 협회 결성과 '대학언론헌장'…주간 '필맥' 20호 뒤 잠정 휴간
1960년대 말까지 대학기자 활동은 UNESCO 한국위원회·대학생봉사연합회 세미나 참석, 1968년 시작된 문공부장관배 대학신문기자 배구대회 등 외부 프로그램이 중심이었다. 그러다 1970년 5월 27일 서울 시내 12개 대학 200여명이 ‘대학신문기자 연합대회’에 모여 대학신문의 기관지적 성격을 벗고 편집자율권의 학생 이양을 결의했다. 이 흐름은 1971년 5월 11일 흥사단 본부에서 '전국대학언론인협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대표 상임위원 3인을 둔 상임위원회가 구성됐고, 5월 14일 상임위원회는 주간 협회지 필맥 발행을 결의했다.
협회는 즉시 현안에 개입했다. 5월 25일 연세춘추 편집자율권 투쟁을 측면 지원했고, 7월 29~30일 불암산 캠프장에서 '대학언론의 이상실현'을 주제로 '제1회 전국대학언론인 세미나'를 열었다. 9월 9일 우석대신문사 편집장 사표 강요 사건에는 특별조사위를 꾸려 조용범 주간교수에게 사표를 받아냈다. 서울대 사대 경찰난입 사건엔 경찰·학교당국에 항의서를 전달했고, 국회에 방문한 문교부장관의 대학언론 자유 왜곡 발언에 대해서는 필맥에 반박문을 게재하고 자율권을 촉구했다. 10월 5일에는 지방대를 포함한 20개 대학 300여명이 신문회관에서 제2차 총회를 열었다.
그러나 10월 15일 위수령과 휴업령이 내려지면서 협회 활동은 원천 봉쇄됐다. 상임위 모임에는 강한 탄압이 가해졌고, 대표 상임위원의 재적 조치까지 이어졌다. 11월 23일 비상 상임위원회에서 10월 26일자 제20호를 끝으로 필맥 잠정 휴간을 결의했다. 선거를 앞두고 서울대·경희대 선배 기자가 구속됐으며, 당시 남학생 중심이던 서울지역 다수 편집장이 강제징집됐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등 사형 집행 인사만 30여명, 민주화 요구 인사들의 의문사 수백명, 서해 어민 1250명이 납북 후 간첩으로 몰렸다는 방송 보도가 있었다. 긴급조치로 대학생 2000명이 구속·강제징집됐다.
이 시기 채택된 '대학언론헌장'은 "대학언론은 대학인의 것(최고 독자는 학생)이며 학생에 의해 제작된다", "대학사회를 대변하고 지향할 창조적 이념을 제시한다",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조화를 꾀한다", "편집권은 학생에게 있고 자율·자주적으로 행사된다", "대학의 자유·학문의 자유 보장이 전제"라는 원칙을 명시했다.

② 1982~84년 자대기련 탄생·침체…비밀 회동·홍성사 거점, 금서와 '필맥' 복간
1979년 10·26 사건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대학신문은 학교 홍보지를 넘어 시대 현안을 다루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의 강경 기조 속에서도 1982년 여름, 개강 직전 주 평일 저녁 동숭동 문예회관 앞에서 4개 대학 5명이 비밀 회동을 갖고 전국 연합조직 건설을 결의했다. 프레스센터 지하 '프레스다방'에 모인 19개 대학 대표 21명은 근처 음식점으로 이동해 회장을 선출했다. 회장이 동·서·남·북 지평별 부회장 4인을 지명했고, 각 사 부장단 모임을 핵심조직으로 삼아 3차년도에는 전체기자 대중조직으로 발전시키자는 구상을 확인했다. 전국조직을 상정하되 전체 기자 총회가 열릴 때까지는 서울지역 편집(국)장 모임이 대신한다는 부칙을 마련했다.
회장단은 종로3가 홍성사 편집실을 거점으로 거의 매주 회동했다. 공개 총회가 무산되는 상황에서 홍성사의 출판 계획을 활용해 1983년 4월 '대학이여, 대학인이여'를 발간했으나 곧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다. 1983년 12월 필맥이 복간돼 2호까지 이어졌고, 선·후배 유대 복원을 위한 체육대회도 열렸다. 1983년 2월에는 '쟁이82'가 신·구임 편집장 모임을 통해 현역에게 조직을 넘겼고, 같은 해 '쟁이83'이 결성됐다. 쟁이82는 자체 회지를 간행하며 선·후배 유대를 다졌고, 이듬해 초에는 관제언론 각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제작해 전국 대학신문과 주요 언론사에 우편 발송했다.
1984년 5월 비로소 81학번이 현역에게 조직을 인수·인계했지만, 모임은 사전에 누설되는 일이 잦아 회합 장소에 안기부·경찰 요원이 들이닥쳤고, 참석자들이 다음 날까지 하루씩 유치장에 머무는 일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1984년 필맥 3·4·5호가 발간되며 명맥을 이었다.
③ 1985~86년 정비기…창립총회 180여명, 조사위 출범, '노도' 창간·주기 변경
1985년 3월, 현역대표자 15인은 자대기련 조직강화 및 활성화를 결의했다. 5월 회칙을 수정·확정하면서 운영위 산하에 편집·기획·재정·조사 4개 상임위원회와 특별위원회를 설치했고, 5월 19일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해 각 대학 언론탄압 사례를 수집했다. 같은 해 6월까지 부기련(부산)·호대기련(호남)·충대기련(충청) 등 권역별 조직 사업의 형식적 틀도 마련했다.
7월 3일 "가자, 민족·민주·민중언론의 새 지평을 향하여"를 내걸고 창립총회가 열렸다. 전경의 원천봉쇄를 피해 산을 넘고 담을 넘어 180여명의 기자가 모였다. 관제언론·정부·언론인에게 보내는 글, 발족취지문, 탄압사례 폭로가 발표됐고, 필맥 6호가 현장에서 배포됐다. 이즈음 쟁이82와 쟁이83은 '민중언론 청년회' 결성을 시도했으나 좌초했다. 대신 총회에 걸개그림을 제작·기증해 현역들의 등 뒤에 부착하게 했다. 총회를 주도한 회장단 다수가 군입대(강제징집 압박 포함)로 빠지면서 2학기 조직은 둔화했지만 1986년 2월 23일 필맥 7호가 발행되었다.
1986년 6월 서강대에서 제2회 총회가 400여명 규모로 열렸고, 같은 해 10월 8일 자대기련 기관지 '노도'가 창간됐다. 노도는 1~3호를 월간으로 낸 뒤(10월 27일 2호, 11월 22일 3호) 4호부터 학기 1회, 7호부터 격월로 주기가 변경됐다. 1987년 5월 31일에는 경희대에서 제1회 대동제가 20여개 대학 200여명 규모로 열렸고, 같은 해 6월 5일 노도 4호가 발행돼 전대기련 결성 직전의 논의가 정리됐다.
④ 1987~88년 전대기련 공식 출범…헌장 공표, 공기단·속보 상설화, 문화분과 확장
1987년 8월 21~22일 지방대를 포함한 50여개 대학이 참가한 제3회 총회가 1박 2일로 진행돼 "사전검열제 철폐·예산자율권 보장"을 결의했다. 같은 해 11월 29일 고려대에서 전국 60여개 대학 700여명이 모여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전대기련) 결성식이 열렸다. 11월 27일 제정된 '대학신문 헌장'이 이 자리에서 공표됐다.
1988년 1월 27일 노도 5호가 발행됐고, 3월에는 '자대학련'이 결성되었다. 6월 5일 서울시립대에서는 '자대기련 비상총회 및 제2회 대동제'가 26개 대학 400여명 규모로 열렸다. 전대기련은 1988년 '6·10 남북학생회담' 취재를 위한 '제1차 공동기자단(공기단)'을 구성했고, 8·15 국토순례 대행진과 제2차 남북학생회담 투쟁 기간에는 '8·15 속보'를 제작·전국 배포했다. 10월 4일 '대학언론 탄압분쇄를 위한 자대기련 비상총회'가 열렸으며, '서울지역 대학신문 만화기자 동인회' 주최 사진전, '문화부기자 연합회' 결성, 12월 24일 자대학련 주최 심포지움이 이어졌고, 책 발간 작업도 병행됐다. 1989년 1월에는 '자대문연'이 시집을 발간했다.
공동취재의 출발점에는 1988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 김중기가 김일성대학에 '6·10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한 사건이 있었다. 1988년 1차 공기단을 거쳐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공기단 구성으로 공동취재 틀이 완성됐다.

⑤ 1989~91년 '매체혁신'·'대중언론관'·총노선, 5월 상황실·속보…방북취재 추진과 판문점 포옹
1989년 전대기련은 '매체혁신'을 결의했다. 주체혁신(민중지향적 시각 견지), 조직혁신(봉건적 관료성·폐쇄성 타파·대중성 확보), 지면혁신('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조화'의 실천적 편집노선 전환)을 골자로 했다. 광고면을 상업적 영역으로만 보던 관점에서도 벗어나 "광고도 지면의 일부"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광고질서 회복운동'이 전개됐다.
1991년에는 1년 사업의 좌표인 '총노선'이 도입돼 전국 편집장들이 전대회를 통해 정세와 혁신운동 성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 계획을 공동 설계했다. 각 단위사는 이를 전술로 번역한 '편집노선'을 수립했다. 같은 해 도입된 '대중언론관'은 언론을 "자연의 구속과 사회적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해방을 위한 정치·사상적 무기"로 규정하고, 왜곡된 언론 질서를 바로잡아 언론의 생산·소유의 주체를 대중에게 돌려주는 '대중언론'의 전망을 제기했다.

1991년 5월 연쇄 분신 국면에서 전대기련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투쟁 제안서를 각 단위사에 배포했다. 제안은 ▲고정적 편집틀을 깨고 투쟁 열기를 수렴하는 지면 전환 ▲단위사별 사진전·기획 대자보·속보·대학신문 시민배포 ▲신문사 비상체계 구축 등이었다. 전대기련 중앙은 중앙상황실을, 각 지역기련은 지역상황실을 꾸려 전화·팩스로 서울과 지역 소식을 긴급 수집·정리해 보도자료·속보를 제작했다. 이 자료는 타 단체에도 제공됐다. 지역 속보로는 서대기련의 '분노의 대오', 부기련의 '부기련 신문', 조대신문·안동대신문의 속보가 있었다. 이 라인은 1992년 대선기 전국 배포물 '청년 전국신문'으로 계승됐고, 1996년 8월 통일투쟁기에는 '4천만 국민여러분께 드립니다', '진실의 소리' 등이 전대기련 또는 연대 명의로 제작·배포됐다.
공동취재의 정점은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공기단이었다. 공기단 선발 경쟁률은 높았고, 다수 기자가 혈서로 결의를 밝히거나 명동성당 단식농성에 참여했다. 같은 해 임수경씨가 전대협 대표로 평양에 참가했다.
1991년 방북취재 추진은 서대기련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보안·진행상의 문제로 전대기련이 아닌 서대기련 차원의 행사로 진행하기로 결정됐다. 당시 '1990년 7·7 선언'과 '1991년 12월 남북합의서 조인 예정'이라는 분위기 속에 민간 교류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서대기련은 범민련을 통한 간접 접촉과 팩스 교신(경희대 대학주보 주간실 발송, 통신료 200만원 이상)을 통해 북측에 서대기련·전대기련을 알리고 방북취재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중국 연수 중이던 오상훈 한대신문 편집장은 북측 대사관에 전대기련·서대기련 기관지 필맥과 노도, 주요 대학신문을 전달했다. 북측의 긍정 답변을 받은 서대기련은 통일부에 북한주민접촉을 신청했고, 통일원은 허가를 내줬다. 분단 이후 처음 판문점에서 남북 대학생이 포옹하는 장면은 한겨레신문 1면 톱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방북취재를 불허했다. 1주일 합숙까지 마친 기자단은 통일부 항의방문으로, 북측은 판문점 비판성명 낭독으로 사업을 마무리했다. 당시 실무회담 대표는 김기헌(성균관대·편집장), 지은경(한양대·문화부장), 최병섭(건국대·서대기련 조직국장)이었다.
⑥ 1992~96년 분과학교·지부체계·교육자료…'표준 작동'의 완성, 온라인 전조
1992년 1월 마석 새터에서 제1회 분과학교가 열렸다. 중앙상임위·정책위의 반대에도 분과 일꾼들의 준비로 행사 하루 전 장소가 변경되는 우여곡절을 뚫고 500여명이 참석했다. 결성 초기 전대기련은 집행부 없이 현역 편집장들이 사업을 직접 집행했고, 학술부를 시발로 문화·사회·사진·만화 등 분과가 자생했다. 1991년 여름에는 '애국기자 후보' 다수가 분과 일꾼이 될 정도로 인력이 두터워졌다. 분과학교 강사진은 오연호(후일 오마이뉴스 대표이사), 오귀환(후일 한겨레 편집국장), 김형수(민예총 사무총장), 정희상(후일 시사IN 탐사보도 전문기자) 등이었다. 1993년부터 지역 분과학교로 분산했고, 1994년 겨울부터는 총회·출범식과 결합한 2박 3일 집중교육이 관행화됐다.
교육 표준화는 1993년 대학언론교육자료집 '대학언론의 현주소' 발간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국언론의 기원과 역사·국가권력과 언론·대중언론관·대중언론 활동가론·대중신문론'이 포함됐고, 단위 교육 현장에서는 '파란 책'으로 불렸다. 1996년 1학기에는 '세계를 바꾸는 대중언론' 1·2학년용이 발간됐다. 1학년용은 신문사 생활(사람 관계, 수습학교, 댓거리 등)과 한국언론사·대중언론 입문을 쉬운 해설로 담았고, 2학년용은 주체·조직·지면으로 나눠 대중언론관을 심화 설명하고 언론운동사를 기술했다. 이후 필맥은 이 교재들의 단위 활용법을 별도로 해설했다.
조직 체계는 1992년부터 '기련'에서 '지부'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기련체계에서 나타난 동맥경화·이중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각 지역의 준비 정도에 따라 해마다 2~3개 기련이 지부로 전환됐고, 1996년 초 경인기련이 경인지부로 전환하며 지부체계가 완성됐다. 1992년에 제작된 '중앙상황실 통신'은 각 대학·지역·사회운동 소식, 공동기사, 공동 설문조사 결과를 묶어 정기 배포하는 허브 역할을 했다. 이후 하이텔 'UNIP 동우회'가 돼 뉴스·자료 공유가 온라인으로 확장됐고, 이 경험은 2000년 대학 전문 뉴스사이트 'Unews(유뉴스)' 출범으로 이어졌다.

⑦ 1994년 이후 현장 결집…전대기련 깃발, '대학신문기자 한마당', 속보의 계승
전대협 출범식부터 1993년 한총련 1기까지 대학신문 기자들은 모교 깃발 아래 학우들과 움직였으나, 1994년 조선대에서 열린 2기 한총련 출범식부터는 전대기련 깃발 아래로 모였다. 전대기련은 한총련 출범식 현장에서 '대학신문기자 한마당'을 열었다. 본연의 임무인 공동기자단 활동은 활발하게 진행되어 조직의 위상이 강화됐다. 속보 제작은 중요한 국면마다 재가동됐다. 1992년 대선기의 전국 배포물 '청년 전국신문', 1996년 8월 통일투쟁기 '4천만 국민여러분께 드립니다', '진실의 소리'가 대표적이다.

'대학언론헌장'
대학사회가 형성되어 제기능을 다하려면 대학사회에서의 문제를 제기하고 대학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고 대학문화의 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면 이러한 사명을 실천에 있어서는 대학의 자유가 그 전제로 되어야 하고, 대학언론은 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침해 제한하는 어떠한 세력도 용납할 수 없으며 이로부터 대학을 보호해야 한다.
특히 대중화의 물결속에서 아카데미즘을 구현하고 저널리즘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학의 公器(공기)인 대학언론은 그 이념과 성격을 선언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는 대학의 보호와 발전을 위한 공동 노력으로 다음과 같이 대학언론헌장을 채택하여 대학언론의 지표로 삼는다.
一. 대학언론은 대학인의 것이다. 대학언론의 최고 독자는 학생이므로 그것은 학생의 언론 학생을 위한 언론이어야 하며 학생에 의해 제작되어야 한다.
一. 대학언론은 대학사회를 대변하고 대학사회가 지향해야 할 창조적 이념을 제시한다.
一. 대학언론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조화를 꾀한다. 대학언론은 학문과 연구를 위한 아카데미즘과 함께 사회현상을 보도, 해설, 비판하는 저널리즘의 기능도 병행해야 한다.
一. 대학언론의 편집권은 학생에게 있고, 이는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一. 대학언론이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1970년 5월 27일 전국대학언론인 협회

제작물의 계보
1971년 주간 '필맥'은 20호까지 이어졌으나 10월 26일자 이후 중단됐고, 1983년 12월 '필맥'이 재창간됐다. 1986년에는 자대기련 기관지 '노도'를 창간했다. 1987년 전대기련으로 전국화된 뒤 1990년 10월 '필맥'이 준비호를 포함해 다시 창간됐다. 그리고 2003년 8월에 78호까지 발간됐다.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의 역사 자료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돼 있으며, 일부는 색인·검색 가능하다. 기증자 '박종진'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400여건의 오픈아카이브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