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기 멀리서 누가 걸어온다. 어디서 봤는데, 누구더라. 낯은 익지만 신원을 정확히 알 수 없어 탄식했다. 그때 번뜩 스치는 올해 9월의 퀴어문화축제. 저분, 내 부스에 들렀다. 내 책갈피를 엄청 샀던 사람이다. 정체를 알아챈 순간 쭈뼛쭈뼛 고민이 시작됐다. ‘인사를 해야 하겠지? 하지만 저분은 나를 모를 것 같아... 아니 근데, 나를 알 수도 있잖아.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기와 아는 사람에게 인사 안 하기 중에서는 전자가 낫지 않을까…? 아무래도 해야 하겠지… 그래, 결심했어. 역시 인사하는 게 도리야... 용기를 내자…’ 대대적인 결정을 내린 순간. 그 사람은 저 멀리 걸어갔고, 이미 그 뒤통수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인사성 없는 책지기가 되어버렸다. 저기요, 잠시만요. 가지 마세요. 저 아직 인사를 못 드렸다고요!
이렇게 나는 인사하는 것조차 고민스러운 일로 만든다. 아침마다 커피와 캐모마일 티를 양손에 들고 저울질한다. 아침 샤워와 밤 샤워 사이에서 우왕좌왕한다. 인생 대소사의 수많은 선택지가 나를 마구 흔든다. 하나라도 뚜렷하면 얼마나 좋을까? 습관이 된 불확실함과 너무 오래 고민하는 성정 탓에, 나는 가끔 대학 안의 나를 소시민처럼 느낀다. 단단한 신념으로 커다란 결정을 내리는 활동가들 사이에서 인사로도 고민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사실에는 엄청난 부채감이 따라온다. 고민하느라 실천할 기회를 놓칠 때, 내가 해내는 일은 없다고 느껴질 때, 내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면 내 마음속 작은 소시민이 말을 건다. 오늘은 그 소시민을 소개하고 싶다.
그 대신 결코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손문길의 단단함이, 강철의 그 질감이 그에게는 부럽게만 여겨졌다. 삶에 대한 이 망설임은 왜 내게만 질긴 것인지, 언제까지 이것과 저것을 함께 생각하며 불투명한 행로를 갈 것인지……. (슬픔도 힘이 된다, 151쪽 중)
나는 그 부채감과 불확실한 나를 상쇄시키고자 책이라는 강력함 뒤에 잘 숨는다. 하나의 주장에 수많은 근거를 대기 위해 200쪽 이상을 소요할 수 있는 강력함. 그 강력함을 쫓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독서라는 행위보다는 책이라는 물건 자체가 좋다. 부스를 열기 전에는 모든 책을 읽다가 과부하가 와 버린 적도 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책을 읽으려는 마음 저 너머를 앞질렀기 때문이다. 부스에서 내가 읽은 좋은 책들을 소개해야겠다는 다짐이 아닌, 책지기로서 책을 다 읽지 않은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초조함을 연료 삼았다. 쪽팔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게도 책 읽기를 진심으로 좋아한 순간이 있다. 부채감으로 시작하는 독서 말고, 진짜로 너무나도 심히 재밌어서 이어지던 독서의 순간이. 하루에 세 시간만 자고 책을 읽을 정도로 책 읽는 일을 좋아했었는데, 그게 언제인지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양귀자의 소설을 두 번째로 접했을 때에도 책 읽기를 그만큼이나 사랑했다.
책지기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당신의 인생 책은 무엇인가?”이다. 그런 질문을 접할 때면 나는 망설임 없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책의 주인공인 강민주는 유명세도 특별할 것도 없는 일반인이다. 그는 이 시대의 가부장적인 남자들의 실체를 밝히고자 유명 배우를 납치해 세간의 주목을 이끌어낸다. 강민주가 납치한 유명 배우를 오늘날의 한국에 대입하자면, 박보검 씨 정도에 비유할 수 있겠다. 강민주는 이러한 국민적 인기와 호감을 얻은 자를 하루아침에 납치해서 신문사에 글을 투고한다. 유명 배우를 본인이 납치했다는 고백과 아주 강렬하게 전하고 싶던 말을 함께 쓴 글이었다. 이 책에는 강력한 면모가 있다. 한국의 1990년대에 페미니즘 소설 출간이라는 어려운 일을 양귀자는 파격적으로 해냈다.
이 책의 강렬한 파격에 홀딱 반해서 양귀자의 다른 책도 사들였고, 가장 최근에는 『슬픔도 힘이 된다』를 만났다. 제목에서부터 ‘힘’이 느껴져서 두근거렸다. 나에게 힘을 마구마구 줄 것만 같은 문장. 그런데 설레는 예상과는 달랐다. 뭐든 하나라도 강력한 마음을 얻고자 펼친 책인데, 이 책의 모든 단편에서는 소시민이 느끼는 혼란을 담고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나보다 훨씬 깊고 자주 혼란을 느끼는 소시민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보다 훨씬 못한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낼수록, 수많은 혼란을 마주할수록 다양한 모습의 ‘힘’을 찾게 됐다. 특히 수록된 단편 「기회주의자」의 이야기가 강렬하게 남았다.
「기회주의자」는 출판회사 노동조합의 이야기를 주인공 ‘정’의 시각에서 풀어나간다. ‘정’의 직장동료인 손문길과 박성태는 각각 위원장과 사무장을 맡고 있다. 본문을 빌려 두 인물을 소개하자면, 손문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주장을 하는 확고부동한 인물”이다. 박성태는 “전폭적으로 마르크시즘을 지지했던 전력에 잇대어 혁명적인 급진사상 일반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는 인물”이라고 칭한다.
그 둘 사이에서 ‘정’은 자신의 언어를 계속 잃어버렸다고 느낀다. 영업과장이 ‘정’에게 노동조합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했을 때에도 ‘정’은 반박하지 못하는 소시민으로 그려진다. ‘정’은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다는 사실을 알지만 손문길이나 박성태처럼 쉽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확실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되지 못해서 회사 사무실만 오면 답답해지고 얼굴이 빨개진다. ‘정’은 괜히 약사에게 약이 잘못되었다고 하소연할 뿐이다.
그래서 ‘정’은 차라리 본인이 손문길을 너무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애정을 빌미 삼아 차라리 손문길의 논리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로 ‘정’은 자신이 확실한 주장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생각을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단어를 찾기 위한 노력은 근간에 그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쓸데없는 소모 중의 하나였다. 그는 매번 낱말 찾기의 미로를 더듬다가 스스로를 경멸하는 쪽으로 신경을 학대하여왔었다. (슬픔도 힘이 된다, 108-109쪽 중)
학교에 있을 때면 나도 ‘정’이 된다. “모두들 사회개혁에 노력하는 것 같은데, 나만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든다. 사람이 빵 공장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나는 다른 업체의 빵을 골라서 빵을 먹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다. 그럴 때면 “이게 나의 최선인가…”라고 생각한다. 말을 계속 끝맺을 수 없게 된다. “세상은 이런데 나는 지금 뭐하는 거지? 나는 뭐지?”라는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아무도 내게 소극적이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옆에서 열심히 행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무겁다. 저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만 무임승차하는 마음이 들어서 더 조급해진다. 조급한 마음을 달래고자 책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일단 배워야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책 읽기를 택했다. 나는 책을 사면 그 지식까지 구매한다고 착각했다. 책 구매와 연동된 지식 자동 백업 서비스는 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완전무결하게 하나가 되는 집단은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인간의 절대적 숭고함을 믿어버릴 수 있는가. 그것 없이는 결국 개인에 대한 억압이, 가증스런 폭력이, 우리들을 옭아매지 않겠는가. 130p
그래서 소시민 마음을 달래는 방식을 바꿨다. 바로 어깨너머로 관찰하기. 2년 전, 1학년이었을 때 같이 학생회 활동했던 사람들의 활동을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첫 번째 쫄래쫄래 대상자는 학생회장이었던 ‘영’. 영에게 얻은 배움 중 가장 소중한 게 있다. 싫은 사람에게 크게 웃어주기. 지난 9월 함께 갔던 기후정의행진에서 우리 일행은 길을 잃고 ‘태극기 집회‘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굉장히 알록달록한 우리가 그 행렬에 섞인 순간, 그들과 우리 사이에서는 의아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은 눈으로 “뭐지? 싸우러 온 건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우리의 피켓을 읽고서 싸움을 걸었다. 기후정의행진, ‘그런 데’에 참가하는 건 자유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일이라고 했던가. 그 말을 들은 영은 한바탕 크게 웃어주더니, 몇 마디 대답을 하고 돌아섰다. 싫은 사람을 웃으며 보내주다니. 덕분에 아무도 다치거나 휘말리지 않고 원래의 목적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영’은 자주 그렇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웃으면서 풀어간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자는 바람이 아니라 햇살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이다. 행동하는 자가 강력하고 단호할 필요는 없구나!
두 번째 쫄래쫄래 대상자는 새내기새로배움터에서 나의 조장이었던 ‘연‘. 연은 지금 나의 동거인이 됐다. 연은 모르는 게 생기면 바로바로 물어본다. 사소한 거 하나까지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자주 던져지는 질문이 처음에는 조금 귀찮고 의아했다. 그래도, 연은 본인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난 모르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 모르면 그냥 고개만 끄덕이기 마련인데. 연과 같이 살면서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행동하는 자는 계속 배우는 사람이구나.
마지막으로, 나를 쫄래쫄래 돌아보기로 했다. 이들과 함께한 시간과 그 안의 나를 돌아보며, 소시민에 대한 나의 정체성을 끝내기로 했다. 강력한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 더 큰 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를 돌아보면서 사람은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작년만 해도 상상하지 않았던 스타일인 쇼트커트로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퀴어문화축제’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1학년을 지나, 올해 우리학교의 퀴어문화축제에서 부스를 열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부스를 한창 바쁘게 진행하던 때에, 누군가 내게 “되게 활동도 열심히 하고 멋지네요~“라며 말을 걸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진저리를 치면서 급하게 해명했다. 나는 적극적인 활동가가 아니라고. ”아… 저는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못했고, 이건 처음일 뿐이고…” 더듬으며 대답하고서 후회했다. 나의 그런 모습은 ‘정’이 따로 없었다(생각해 보니 나랑 성도 같아서 더 울고 싶었다). 인사치레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분위기를 망쳤다.
이 부끄러운 대화를 곱씹으며 깨달은 것 하나가 있다면, 사람들은 당장의 나, 지금 존재하는 나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아주 소심했던 나, 우왕좌왕하고 모호하던 나, 과거의 나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다. 이들은 같은 공간에서 연대하는 나를 바라본다. 지금 당장 같이 있는 나를 똑바로 인식해 준다. 이 쪽팔림과 깨달음 이후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세상에 힘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니 당신도 이 학교에서 무임승차하는 사람처럼 느낀다면, 우선 승차하고 존재하며 함께한다는 사실에 의미를 둬보는 것 어떨까…? 일단 승차해 있으면 언젠가 운전대도 잡고, 힘들면 다른 사람한테 운전대도 넘겨주고, 창밖도 한 번 보고, 이것저것 해볼 수가 있으니까…
또 문장 끝을 흐리게 된다. 변명도 쓰게 된다. 별로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사실을 안다… 글에 대한 자신감이 아직은 없다. 글을 보여줄 자신감이 내게는 없다. 그럼에도 글을 낸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여기고 싶다. 내 글이 다른 사람 눈에도 존재한다는 의미가 있으니까!
글 : 삼이
편집 : 윤영우 기자, 주미림 기자
디자인 : 윤영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