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8 (토)

대학알리

어긋나고 흔들리기에 인간이다: AI 시대, 스크린이 지켜낸 온기

BIFAN 2026 현장 - AI 단편 세션의 기술적 고민과 <트로피>가 보여준 서사의 힘

 

 * 본 리뷰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7월 3일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는 AI 영화 국제경쟁과 함께 대대적인 기술적 전환을 발표하면서 기대감을 모았다. 하지만 현장에서 기자에게 가장 강렬한 잔상을 남긴 것은 재일 조선인 3세 소녀의 서툰 소동을 다정하게 담아낸 극영화 한 편, 바로 손명아 감독의 <트로피>였다. 판타스틱영화제라는 기술과 장르의 최전선에서 기자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울린 순간이 오히려 가장 현실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였다. 이 아이러니한 어긋남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걸까.

 

 

AI 창작자들의 기술적 투쟁: 완벽한 '형식'을 향하여

 

<부천 초이스 AI 영화 단편 1> 세션 GV 무대에는 젊은 창작자들이 나란히 앉아 관객의 질문에 답했다. 생성형 AI 덕분에 예산과 인력의 한계를 넘어선 이들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온 고백은 기술적 해방감보다는 고단한 투쟁에 가까웠다.

 

<티켓 투 네버랜드> 연출진은 비전공자임에도 AI 툴을 통해 3D 애니메이션을 구현할 수 있었다고 밝혔으나 손가락처럼 미세한 디테일과 정교한 공간 구도를 제어하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음을 털어놓았다. <BFF>의 최혁진 감독 역시 주인공이 두려움과 슬픔에 떠는 감정선(페이셜 연기)을 온전히 연출해 내지 못해 결국 연출적으로 타협해야 했던 순간들을 전했다. 대규모 특수효과를 손쉽게 구현해 낸 <마지막 무당> 팀 조차, 컷과 컷 사이 인물과 공간의 일관성을 지켜내는 일이 가장 가혹한 난제였다고 토로했다.

 

세 작품의 창작자들이 공통으로 마주한 벽은 하나였다. AI가 화려한 스펙터클과 시각적 형식을 만드는 데는 탁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연속성'과 '인간 고유의 섬세한 감정'을 완성하는 데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형식을 잃어도 바래지 않는 감정의 미학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연출부 출신 손명아 감독의 장편 데뷔작 <트로피>. 이 영화는 재일 조선인 3세 소녀 소희가 최애 K-POP 아이돌(BTS) 콘서트 티켓값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의 소중한 북한 훈장을 몰래 중고 거래로 팔아넘기며 벌어지는 소동극이자 다정한 가족극이다. 일본 사회 내에서 정치적인 시선과 함께 오인되곤 하던 조선무용과, 전 세계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K-POP을 교차시킨 손명아 감독은 정치적 색채를 털어내고 부모와 싸우고 친구와 갈등하며 아이돌을 좋아하는 보통의 청소년으로서의 동포의 삶을 화면에 온전히 드러낸다.

 

 

 

아버지의 일생의 신념과 조국을 향한 헌신이 담긴 '훈장'이 딸에게 콘서트 티켓으로 치환되는 순간, 세대와 문화의 간극은 날카롭지만 조용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누구의 잘못도 묻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삶의 궤적에서 비롯된 이 서툰 어긋남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포착할 뿐이다. 이는 일상 속 미세한 균열을 관찰하고 보듬는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화법과  맞닿아 있었다.

 

결국 소희는 무심코 팔아넘긴 아버지의 훈장, 즉 과거 세대의 정체성을 완벽히 되찾아오지는 못한다. 그러나 훈장을 찾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그 과정에서 소희는 자신이 왜 춤을 추는지, 그 진정한 의미와 미래 세대로서의 자신만의 정체성이라는 '더욱 값진 트로피'를 손에 쥐게 된다. 눈에 보이는 껍데기는 상실했을지언정,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진심을 찾아가는 실질적인 알맹이(관계와 정체성)는 더욱 단단해진 셈이다.

 

 

AI가 계산할 수 없는 것

 

상영 후 이어진 <트로피> GV 현장은 인공지능이 감히 대용할 수 없는 인간적 시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자리였다. 2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소희 역으로 캐스팅된 항나(Hanna) 배우는 캐스팅 당시 무용도 못 하고 대사도 잊어버리는 불완전한 상태였다. 손명아 감독은 그 서툰 자연스러움 속에서 진짜 소희의 얼굴을 포착했고, 항나 배우는 1년간 매일 24시간 연습 일지를 쓰며 조선무용을 익혀 스크린 위에 진짜 감정을 올려놓았다.

 

한국어 대사에 감정을 싣기 위해 숨 쉬는 지점까지 감독과 매일 다듬어 나갔다는 배우들의 고백, 그리고 현장에서 "오사카 동포들의 삶을 어제 본 사람들처럼 가깝게 그려줘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힌 한 관객의 감상평은 스크린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각인시켰다. 북한을 조국으로 둔 재일교포의 애국심을 바라보는 한국인 관객의 묘한 정서, 세대를 건너 반복되는 어긋남과 연결성은 그 어떤 정교한 알고리즘도 연산해 낼 수 없는 영역으로 다가왔다.

 

AI가 가져다준 기술적 해방은 분명 달콤하다. 그러나 스크린이 존재하는 진짜 이유는 타인의 서툰 삶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며 느끼는 가슴의 울림에 있다. 눈에 보이는 형식(훈장, 티켓, 픽셀)이 다소 무너지거나 어긋나더라도 그 안의 것—감정과 신념, 그리고 사랑—을 잃지 않는 것. 1년 동안 노트에 마음을 적어가며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은 배우의 시간처럼, 각자가 주체가 되어 자신만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내는 것.

 

기술의 시대에 인간 감독과 배우들이 스크린 너머로 온화하게 지켜내야 할 패러다임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7월 3일, BIFAN에서 마주한 두 개의 스크린은 그 답을 조용히 가리키고 있었다.


[작품 정보]

 

<트로피> (2026, 102분)

 

감독: 손명아 / 주연: 항나, 이우라 아라타 / 제작: K2 Pictures⁠ / 수입·배급: 엣나인 필름,  K2 Pictures

 

 

조예원 대학알리 기자 (yewon02107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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