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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보고서] 2편. 박성빈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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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찌질함과 사랑

 박성빈은 1995년, 서울 천호동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그 동네 토박이다. 그에게 가족이란 그리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눈뜨면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처음 맺은 관계였다. 하지만 그는 가족의 이야기를 쓴다. 키가 크고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잘 다려진 교복 셔츠를 입고, 준비물을 잊지 않고 챙겨가고, 대학을 다니면서 자취를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가족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종의 부채감이었다.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사회적 통념도 한몫했다.

 

 그를 따라다니는 부채감을 해소하려면 그들과의 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친밀하지 않았던 존재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이야기를. 글을 쓰다 보니 그를 짓눌렀던 부채감은 조금씩 옅어졌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몇십 년간 자신을 키워준 사람에 대한 예의로써 대화의 필요성은 아직 그에게 유효하다.

 

 

 그가 처음부터 가족 이야기를 쓴 건 아니었다. 그의 글쓰기는 중학생 때부터 시작됐다. 처음에 그가 꿈꿨던 건 영화 “그을린 사랑”의 드늬 뵐 뢰브 감독 같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소설을 쓰는 작가였다. 이제 그는 깊은 통찰이 담긴 글을 쓰는 이가 되고 싶다. 은희경의 소설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열심히 살고 있다.

 

 은희경은 그에게 특별하다. 그는 냉소적인 글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구병모, 은희경 작가의 글들. 특히 ‘은희경의 위악과 냉소는 징징거림이 아니다. 그 상황을 진짜 예리하게 파고드는 냉소다.’라고 박성빈은 말한다. 은희경은 다양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빌려 세상을 냉소하는 작가다. 그녀 소설의 한 대목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딛고 선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은희경, <새의 선물>, 문학동네, 2010.)

 

 위악은 그에게 위안을 준다. 박성빈은 찌질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간이 찌질하다고 생각한다. 다들 찌질한 구석을 숨기고 있어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이란 사실, 작은 것에 연연하는 존재이다. 사람들은 위악 속에 숨겨진 무언가를 들키려 하지 않지만 박성빈은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내 주변의 기대를 차단하고 동시에 실망의 위험에서 벗어난다. 사실 박성빈은 위악한 그들이 귀엽고 가엾다. 그는 그 사람들과 위로를 주고받고 싶다. 그래서 박성빈은 ‘은희경’을 읽는다.

 

 

 이런 그가 쓴 수많은 글 중 완성된 소설이 몇 있다. 본인만의 철학을 담았다. 그는 이 소설을 과제로 제출한 수업에서 낮은 성적을 받았다. 그는 이를 두고 본인의 개똥철학이 들통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세계에 공감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것뿐이다. 그뿐이다.

 

 

 이제 그의 글쓰기는 더 많은 의미를 담고 항해 중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무던히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야가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좋은 사람이라 믿는다. 시야가 넓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맥락을 헤아릴 수 있고 이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학보사 기자 생활을 통해 본인의 시야를 가늠할 줄 알게 됐다. 공시생 관련 기사를 준비할 때 그랬다. 그는 그 취재를 통해 누군가를 자신의 경계 밖으로 내몰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취재의 경우도 비슷했다. 그러한 경험들 이후로 그의 글쓰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는 변하기 위해 글을 쓴다. 변화와 이를 위한 성찰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는 성찰해야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변화를 그렇게 설명한다. 그는 오만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자신의 둔탁한 사고가 깨지는 경험들은 끝까지 그의 마음에 남는다. 그래서 그는 도망칠 수 없다. 그 찝찝함을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 그는 쓴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알기 위해 글을 쓴다. 자신이 어떤 인간이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말과 글로 표현하지 않으면 ‘박성빈’이 증발해버려서. 이를 막기 위해 활자와 언어로 남겨야겠다고 꼭 다짐한다. 그가 요즘 쓰는 글의 대부분은 기사지만, 그는 기사의 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쓴다.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걸 계속 환기하고 기억해내려 애쓰며 기사를 쓴다. 그의 글엔 이런 수고가 담겨있다.

 

 그는 문제를 알리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또다시 글을 쓴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아무리 그의 내밀하고 사적인 경험이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그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문제는 사실 어떻게든 구조와 얽혀있다. 가족이 그랬다. 박성빈은 ‘돌봄’이라는 단어가 눈에 밟힌다. 그는 가족을 싫어했고, 자신이 평생 ‘아버지’를 발설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박성빈이 그 부모의 수고와 돌봄을 인식하고 난 후 깨졌다. 그의 착각이 그의 탓만은 아니었다. 세상은 자신의 책임인 돌봄을 ‘가족’에게 떠넘겼다. 그래서 세상엔 많은 박성빈이 존재한다. 그는 이제 수많은 박성빈을 돌봄의 압박으로부터,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잘 사용하고 싶다.

 

 

 그는 휴학한 이후 글쓰기에 열심을 쏟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별 때문이었다. 이별은 그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사랑은 그에게 심급 같은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게 있다면, 그는 그게 사랑이라 생각한다. 사랑은 그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변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변화를 통해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했던 경험이 어느 방향으로든 개인을 변화시키는 거라고 믿게 됐다.

 

 사랑이 중요한 그는, 밥을 먹을 때마다 사랑을 묻는다. ‘당신의 변화를 알고 싶다’라는 약간의 계기를 더해서 말이다. 그는 사랑을 통해 앎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요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다시 읽고 있다. 이 책은 그에게 ‘사랑의 완성은 배신을 수반한다’라는 생각을 품게 했다. 그가 사랑에 빠지는 계기는 상대에게 투영시킨, 사실은 착각인, 이상향의 발견이다. 하지만 그 이상향이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깨져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깨짐과 배신감을 이겨내고 상대를 포기하지 않는 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랑도 일종의 능력이라 생각한다. 그는 사랑을 시작하기 전 질문하는 사람이다. “이게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라고. 그래서 그는 그걸 자문하지 않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그래서 사랑은 능력이다. 역시 그에게 사랑은 중요하다.

 

 

 사실 글쓰기를 그가 스스로 선택한 건 아니다. 그는 운명론자다. ‘하루하루는 최선을 다해 살되, 인생은 운명에 맡기자.’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그에게 삶은 개연성을 찾아볼 수 없는 그래프다. 그의 궤적을 보면 그의 뜻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학보사를 한 것도 대학알리의 기자가 된 것도 그에게 중요한 순간들은 그렇게 모두 우연이었다. 그는 이미 짜여진 거대한 좌표를 조금씩 전진하는 게 삶이라 생각한다. 그는 그 전진 역시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한다. 전진을 위한 선택의 상황을 만드는 건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진하는 것 역시 그의 뜻대로 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숨을 쉬며 좌표를 좇는다.

 

 

 글과 찌질함과 사랑이 중요한 박성빈은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그에게 좋은 글이란 모든 이의 맥락이 반영된 글이다. 그는 육하원칙에 따라 사실을 나열하는 글을 지양한다. 독자가 어떤 판단을 할 수 없게끔 만들기 위해서다. 세상이 절대적인 이분법으로 쪼개지지 않듯이, 그는 자신의 글도 무언가를 단정 짓는 글이 아니길 바란다. 절대 악과 절대 선을 상정하고 쓰인 수많은 글 속에서 그는 그렇게 빛나는 글을 찾고 쓸 것이다.

 

 

 박성빈은 변하는 중이다. 그는 이미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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