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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에 '결정타' 이종권 - 이석 구타치사사건

그들은 왜 사람을 '고문'하고 죽였나

2019년의 전남대학교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현직 전남대학교 총동아리연합회장 황법량과의 친분으로 전남대학교 1학생회관 2층 왼편에 위치한 총동연 사무실에 종종 방문한다. 이곳에서 업무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친구를 내버려 두고 안쪽에 위치한 방과 창고를 한 번씩 열어볼 때가 있다. 그곳에는 몇몇 난해한 전공 서적과 담요가 어질러져 있는 온돌방과 버려진 물품들로 가득한 창고가 방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공간은 불과 20여 년 전, 끔찍한 살인사건의 현장이었다. 그것도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던 학생운동의 간부들이 저지른 파렴치한 범죄행위의 장(場)이었다.
1996년 8월, 위대했던 광주항쟁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한국의 학생운동은 16년 만에 역사적인 변곡점을 마주했다. 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8.15 범민족대회 및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김영삼 정부가 불법으로 규정하고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 이후 벌어진 학생운동세력과 국가권력의 전면적 충돌은 학생운동세력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선사했다. 일명 '연대사태'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그해 11월, 격전지였던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비운동권 계열 후보는 모든 단과대에서 과반수 득표를 받고 당선되었다.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총련)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996년 11월, 강위원 후보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강위원은 한총련 제5기 의장으로도 당선되어 전임 한총령 의장이자 전남대 출신으로서는 두 번째로 학생운동권의 수장이 된 정명기 총학생회장의 뒤를 이었다. 이 시점까지 전대협, 한총련으로 이어지는 학생운동사에서 '의장'을 맡았던 전남대생은 1990년 5.18 민중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전대협 의장이 된 송갑석과 한총련 4, 5기 의장 정명기, 강위원 세 사람이다. 그러나 강위원 의장은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학생운동이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 -


1997년 5월 26일, 어느 필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던 니체의 경고는 실로 이날을 위해 예비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보다 한 달 앞선 1997년 4월, 전남대학교를 동경하던 송원대학교 졸업생 이종권이 '박철민'이라는 가명으로 전남대학교 기계공학과 1학년생을 가장하여 문화동아리 '용봉문학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종권이 선배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아리 회장 구영민은 이종권을 경찰이 보낸 프락치로 오인했고, 그를 총동아리연합회 사무실로 호출했다. 1997년 5월 26일 오후 8시 30분, 이종권은 총동연 사무실에서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 (남총련) 정책위원 이승철에게 인계되었으며 마스크를 쓴 여러 학생들에 의해 동아리실 내부 별실로 끌려갔다. 그 다음날은 하필, 5월 27일이었다. 정확히 17년전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시민들은 최후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했다. 그들은 비어있는 도청을 계엄군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광주의 새벽은 민주주의의 아침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에서 비롯된 학생운동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기념비적인 날, 수치스러운 범죄를 역사에 남겼다. 총동아리연합회실에 모인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들은 끌려온 이종권을 다짜고짜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락치라는 사실을 실토하라며 5월 27일 새벽 3시경까지 무려 7시간 동안 조사를 빙자한 가혹행위를 지속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를 물고문 끝에 살해한 독재정권의 폭력이 떠오를 정도였다. 폭행에 가담한 건 남총련 의장 정의찬 (조선대 총학생회장), 정책위원 이승철, 장형욱, 남총련 기획국장 전병모 (전 순천대 총학생회장), 전남대 총학생회 오월대장 최석주, 투쟁국장 전연진 등 총 6명이다. 이들은 이미 '괴물'이었다. 이들은 주먹은 물론 쇠파이프를 이용해 이종권을 무자비하게 폭행했으며 결국 이종권 은 강제로 삼키게 된 소화제가 기도에 걸려 질식으로 사망했다.

 

 

 이종권이 사망하자 당황한 남총련 간부들은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실에 조동호 연대사회국장, 이진실 선전부장, 구광식 섭외부장, 남총련 김형환 투쟁국장, 송선주 투쟁국장 (95년), 강재학 고문 등 전남대 총학생회 및 남총련 간부 8명이 모였다. 이들은 사망장소가 2층 동아리실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하고 "전남대 대강당 옆 잔디밭에서 우연히 이 씨를 발견하여 응급조치했으나 사망했다"고 말을 맞추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종권의 어머니가 사건 당일 "이종권이 대학을 다니는 게 맞느냐"고 추궁하는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 기지국 조사 결과 해당 전화가 전남대 총동연실에서 걸려온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추가 수사 결과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종권 살인사건에 연루된 피의자 18명은 차례로 검거되어 법정에 섰다.

묵묵부답이던 정의찬 남총련 의장은 폭행에 가담하여 가혹행위를 격려했음을 자백했다. 이들 중 살인에 가담한 정의찬 남총련 의장에게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3년, 벌금 2000만원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이승철, 장형욱, 전병모 등 피고 3명에게는 징역 4년형이 선고되었다. 최석주 피고에게는 징역 2년형이 선고되었으며 18명의 관련자들은 모두 법적 심판을 받았다.

 

조선대 총학생회장과 남총련 의장을 역임한 정의찬은 2020년 현재 조선대학교 민주동우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사건에 가담했던 전남대 총학생회 구광식 섭외부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으나 2003년 3개월에 걸쳐 20여 차례의 강도, 강간 범죄를 저질렀으며, 2003년 8월 21일 오후 10시경 광주 북구 문흥동의한 호프집에서 성폭행에 실패한 직후 피해자 A씨를 칼로 마구 찔러 살해했다. 결국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구속 수감되었다.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에 가담했던 이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활동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 범죄에 가담했다. 광주항쟁은 바로 이러한 폭력에 당당히 맞섰던 사건이었다.

 

- 이석 구타치사 사건 -

 

1997년 5월 31일, 한총련 5기 출범식이 한양대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경찰은 출범식을 철저히 봉쇄하겠다고 쇄기를 박아놓았다. 결국 그해 한총련 출범식은 한양대학교에서 열리지 못했다. 출범식 일정은 1주일에 걸쳐 진행되었고 6월 5일 서울대학교에서 마무리되었다. 그 사이 한총련이 자행한 또 한 건의 범죄가 대한민국을 전율케 했다. 바로 '이석 구타치사 사건'이다. 1997년 6월 3일 오후 6시, 여전히 출범식장으로 예정되어 있던 한양대학교에서 한총련 간부들이 근방을 지나고 있던 선반공 이석을 납치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들은 이석을 경찰 프락치로 몰았고 다음날 오전 9시까지 고문했다.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으로부터 불과 1주일이 지나기 전의 일이었다. 한총련 간부들은 이석을 침낭으로 감싼 후 물을 뿌려가며 경찰 진압봉으로 쉴 새 없이 폭행했다. 한양대학교 투쟁국장 배주환은 의식을 잃어가는 피해자의 코에 최루가스 분말을 집어넣는 등의 고문까지 시행했다. 그들의 폭력성은 이미 도를 넘어 있었다.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 이준구는 폭력을 주춤하는 구성원들을 향해 "전쟁상황인데 인륜을 생각할 때냐"라고 말하며 고문을 독려했다. 결국 피해자는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과 달리 이석 구타치사 사건은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주었고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제 1야당 당수가 이석 씨의 빈소에 조문을 가는 등 사회적 공분이 확산되었다. 한총련은 이석 씨의 죽음을 놓고 내부 갈등에 빠졌다. 당시 한총련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던 80년대 후반 학번들은 "김영삼 정권이 죽인 것으로 발표"하자고 주장했다. 한총련은 우선 "한총련 사무실 주변을 서성거리던 이석 씨를 발견하고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폭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술서를 쓰게 한 뒤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이씨가 갑자기 달려들어 목을 조르는 바람에 이씨를 묶어 놓은 채 사무실을 나간 것으로 안다"고 발표했다.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고 있다는 이유로 일말의 도덕성마저 상실한 한총련은 이 사건으로 중대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들이 저지른 고문치사는 불과 10년 전 독재정권에 몰락을 제공했던 단초였다. 이석씨 폭행 가담자는 22명에 이르렀으며 길소연 (한양대 교육학과 졸), 권순욱 (건국대 2년), 이호준 (건국대 3년), 정용욱 (건국대 1년), 정욱열 (건국대 황소대원), 김호 (서총련 투쟁국장), 배주환 (한양대 투쟁국장), 이준구(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를 비롯한 한총련 간부들이 차례로 검거되어 법정에 섰다. 6월 5일 한총련은 서울대학교에서 '고 이석씨 애도식 및 5기 한총련 출범식'을 진행했다. 한총련은 이창희 (단국대 3년)를 이석 구타치사 사건 진상조사위원장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미 등을 돌린 후였다. 학생운동의 도덕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한총련 강위원 의장은 1997년 7월 2일 전남대 농활 출범식 참석 직후 광산구의 한 아파트에서 체포되었다.
그해 11월 전국에서 실시된 총학생회 선거 결과 비운동권이 전체 대학교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반미구국의 철옹성으로 불리던 전남대학교 마저 비(非)한총련을 내세운 총학생회에 함락되었다. 이들은 1998년 5월 13일부터 이틀간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총련 탈퇴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17,422명의 전남대 재학생 중 44%인 7,691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이중 6,565명(86%)이 한총련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린 무고한 청년들에 대한 고문살인으로 한총련은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남총련은 주요 간부들의 구속 이후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한총련 내부 주도권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6기 한총련 의장에는 손준혁 영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당선되었다. 이창희는 "강위원 의장이 체포되기 직전까지 북한과 소통하던 비선간부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고, 그들이 누설한 정보에 의해 (강위원 의장이) 궁지에 몰렸다"고 주장한다. 이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몰려 주요 간부들이 모두 수배되었고 사수파와 혁신파로 나뉘어 내부갈등을 이어갔다. 이미 앞선 사건들로 인해 시민들의 지지를 상실한 뒤의 일이다.

 

사건 당시 폭행에 가담했던 서총련 투쟁국장 김호씨는 최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작성했다.

 

 

이는 자신이 저지른 '묻지마 폭행' 범죄 행위에 대한 명백한 자백이다. 그는 "살면서 객기도 필요한 법이다"라고 덧붙였다. 죄없는 시민을 고문 끝에 살해한 범행에 가담했던 일과 무고한 사람에 대한 묻지마 폭행사이에 그 어떤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는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었다. 강위원 한총련 의장은 출소 후 한총련 혁신운동을 주도했으나 본인이 저지른 '성희롱 사건'으로 인해 학생운동을 떠나게 되었다.
 

결국 1980년 오월 광주에서 비롯된 학생운동의 뜨거웠던 맥박은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 고동을 멈추게 되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1996년의 연대사태와 1997년의 두 고문살인이었다. 이 역사의 교훈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작성자 : 동별, 칼럼니스트, <나는 신천지에서 20대, 5년을 보냈다> 저자

시리즈 :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

원문 : https://brunch.co.kr/@1980may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