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여러분들은 언제 화장실에 가시나요? 식사 전에? 식사 후에? 혹은 급할 때? 아니면 가기가 귀찮아 참았다가 단 번에 모든 필요를 해결할 수 있을 때 가시나요? 어느 선택지가 되었든, 자기가 가고 싶을 때 주체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를 할 것 같습니다. 본래, 화장실이란 개인적인 ‘필요’ 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이니까요. 그러나 과연 모두가 그런 ‘권리’를 누리고 있을까요? 분뇨감이 느껴질 때, 개인적인 용무와 필요를 위해 화장실에 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권리, 혹은 누구나가 다 누리고 있는 당연한 권리로 생각되는 것이 아마 통상적인 인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주변에요. 일용직 노동자, 서비스직과 판매직, 이동 노동자, 건설현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형마트에 장보러 갈 때,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카페에 갈 때, 백화점과 중·소형 상점을 갈 때 우리를 따듯한 웃음으로 맞이해주는 ‘그녀들’을 우린 늘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에게 ‘화장실’이란 공간은 우리들의 ‘화장실’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녀들
학생회의 ‘현재성’과 의의, 그리고 「기초연구」 대학 입학 후 가장 먼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정치’ 조직. 우리의 공적 의견을 대변하고 사적 이해관계를 수렴하여 의제를 형성하는 대의 조직. 학생들의 ‘대표’라는 정치적 상징을 가지고 사회 이슈에 대해 대·내외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자발적 결사체. 학생회를 ‘이상적으로’ 정의한다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그런가? 지금 학생회는 학내에 산재해있는 다양한 갈등과 문제들, 예컨대 학내 성관련 범죄들, 교수-학생 간 위계관계에서 오는 암묵적 폭력, 마이너리티 정체성 소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대한 의제 형성 및 공론화, 코로나 국면에서의 비대면 수업 관련한 ‘질’문제 등등 이러한 문제들을 양산하거나 이에 대해 무관심한 학교 관료행정체제에 맞서 ‘대항 결사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아니, ‘자치’는 고사하고 핵심적인 의제들은 묻어둔 채 매년 축제와 휘발성 이벤트들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학생회의 의사결정과정은 어떠한가? 민주적인가? 독단적인가? 애초에 학생들은 학생회와 학생 사회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치열한’ 응답이 있다. 서울시 청년허브에서 지원하고 예
유사대학생이라는 이름의 ‘상징’ 인터넷 커뮤니티나 내가 다니는 학교의 사이버 커뮤니케이션 공간인 ‘에브리타임’에는 이른바 ‘유사 대학생’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게 뭐냐고? 그러니까, 너는 대학생 축에도 끼지 못하는 ‘지방대생’이니까 우리 ‘대학생’ 보다는 결여되어 있는 존재인 ‘유사 대학생’이 어울린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보통 명문대 내지 서울권에 속해있는 ‘대학생’들은 학교의 이름이 가지는 ‘상징’이 그 대학생들의 능력과 역량을 보장해준다. 그러니까, 굳이 구차하게 부연설명을 하나하나 달면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아도 진중한 학문적 관심이라든가, 그사람의 뛰어난 지적 능력이라든가, 열심히 살아온 과거라든가, 혹은 열정적인 삶의 ‘개척자’라든가 하는 올바른 청년모델의 담지자로서, 진정한 ‘대학생’으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유사 대학생’들은 본질적으로 부족한 존재로서 묘사된다. 그들은 학교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상징’이 전자와는 정반대로 기능하는데, 보통 그들은 능력과 역량이 부족한 존재, 너무나 게으르고 학문적 관심이 없는 존재, 꿈과 희망이 수동적이고 지적 역량이 부족한 존재로 사회 속에서 현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사 대학생들’은
<피로사회> 한병철 저. 반복되는 일상의 패턴과 지속되는 일상의 무기력함, 피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특별히’ 신경 써서 교정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로서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흔한 노력의 산물이며 ‘성장통’이라는 신화 속에서 정당화되고 일상화된다. 이러한 개인들의 일상은 흔히 아르바이트, 직장 생활, 학교생활 등등 여러 가지 개별적인 과정들에 의해 진행 되지만 그들은 모두 ‘피로’하다. 하지만 이러한 피로함을 그저 노력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 하는 긍정성의 언어들로 충분히 포섭하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개개인들의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적신호’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답은 ‘아픔과 자기파괴를 동력으로 삼고 노력하는 것’에 있는 것일까? 수많은 자기계발담론들 혹은 어른들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조언들은 보통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나도,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분명 좁아지는 취업시장의 문제로, 태생적인 가난과 물질적 빈곤으로, 학력이라는 상징자본으로 위치 지어지는 ‘위계’로, 다양한 정체성에서 소수자라는 이유로, 그들은 사회가 제공한 ‘자유로운 환경에서 마음껏 경쟁하라!’라는 명령아래 수없이 경합하